‹ 목록으로 8000시간, 1021개 직업

3화

"고맙다." 여자가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밥과 나물, 계란 지짐이 담겨 있었다. 뚜껑 안쪽에 김이 뽀얗게 서려 있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기철이가 만든 거야." "상인 아저씨가요?" "그 사람 요리 솜씨가 좋아." 여자가 웃었다. 웃는 얼굴이 되니 아까와 다른 사람 같았다. 처음 마주쳤을 때의 여자는 눈매가 굳어 있었다. 지금은 그 굳음이 다 풀려 있었다. "너 이름이 뭐니." "이하준이에요." "난 정순임이야." 그녀가 밥을 한 술 떠먹었다. 숟가락을 쥔 손이 여전히 조금씩 떨렸다. 그런데도 입에 넣는 동작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맛있어." 짧고 소박한 감탄이었다. 나는 그 감탄을 몇 초 동안 곱씹었다. 게임 속에서 정순임이라는 NPC는 대화창 세 줄로 정리되는 존재였다. [촌장의 먼 친척. 형편이 어려움.] [퀘스트: 도시락 전달.] [보상: 소량의 경험치.]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렇게 웃고, 이렇게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쥐고, 이렇게 소박하게 맛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세 줄이 사람 하나를 담을 수 없다는 걸, 나는 그제야 실감했다. "기철 아저씨한테 잘 먹었다고 전해줘." "네." 나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걸어가는 내내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게임 지식이 맞았다. 장소가 맞았다. NPC의 존재도 맞았다. 세 가지가 다 맞아떨어졌다. 확인이 하나씩 쌓일 때마다 발밑이 단단해지는 느낌이었다. 다만 그 안에 담긴 것들이 예상보다 더 진짜였다. 무기 상점으로 돌아갔다. 가게 문 앞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최기철이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면서. "어떻게 됐어?" "잘 전해드렸어요. 맛있게 드셨어요." 최기철의 얼굴이 확 풀어졌다. 굳어 있던 눈썹이 펴지고,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 표정 변화가 순식간이었다. "고맙다, 진짜." 그는 카운터 아래에서 뭔가를 꺼냈다. 나무 상자를 열고, 헝겊에 감긴 물건을 풀었다. 녹슬지 않은 단검이었다. 칼날에 옅은 푸른빛이 돌았다. 빛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각도에 따라 그 푸른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이거 받아." "이게 뭐예요?" "현역 단검이야. 마을 대장장이가 만든 최상품이지. 원래는 비싸서 못 팔았는데, 네 덕분에 마음이 놓였다." 나는 손잡이를 쥐었다. 무게가 예상보다 가벼웠다. 손잡이 표면에 나무 결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이템 획득: 현역 단검] [등급: 레어] [효과: 공격력 +12, 치명타율 +5%] 눈앞에 글자가 떠올랐다. 글자는 반투명한 창처럼 시야 위에 겹쳐 보였다. 손을 흔들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심장이 뛰었다. 게임에서 봤던 그 아이템이었다. 똑같은 이름, 똑같은 효과. 이 세계로 떨어지기 전, 나는 이 게임을 삼 년 넘게 붙잡고 있었다. 공략을 다 외웠고, 아이템 표를 다 외웠고, 최상위 빌드를 다 외웠다. 그게 이 순간까지 쓸모없는 취미인 줄 알았다. 첫 성공이었다. 확실한 증거였다. 게임 지식이 이 세계에서 그대로 작동한다는 증거. 주식으로 치면 첫 매수 종목이 정확히 예상대로 움직인 셈이었다. 차트를 백 번 돌려봐도 이 타점이 맞았다.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고맙습니다!" "뭘, 내가 더 고맙지." 최기철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두꺼웠다. 그 두꺼운 손에서 오래 일한 사람의 굳은살이 느껴졌다. 마을을 나와 촌장의 집으로 걸어가는 길, 나는 단검을 계속 쳐다봤다. 칼날에 내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이대로만 하면 된다. 게임 지식을 그대로 따라가면 최강 직업까지 갈 수 있다. 확신이 몸속에 차올랐다. 머릿속으로 다음 퀘스트 목록을 그렸다. 촌장의 심부름, 대장간 재료 수집, 마을 외곽 몬스터 사냥. 전부 알고 있는 경로였다. 전부 정답을 알고 있는 시험지 같았다. 그런데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쳤다. 엄마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걸음이 멈췄다. 분명 죽기 직전, 엄마 목소리를 들었다. "밥은 먹었어?" 그 목소리는 기억이 났다. 목소리의 높낮이도, 말끝을 흐리는 습관도 기억이 났다. 그런데 얼굴이 안 났다. 어떤 눈매였는지, 어떤 머리 모양이었는지, 아무리 애써도 떠오르지 않았다. 손이 차가워졌다. 분명 있었다. 엄마는 분명 존재했다. 그런데 그 존재를 증명할 이미지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숨이 가빠졌다. 뭔가 사라진 게 있었다. 임시 직업을 받았을 때 몸이 가벼워지며 뭔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있었다. 그때 빠진 게 이거였을까. 나는 그 자리에 선 채로 눈을 감았다. 기억이라는 게 이렇게 구멍이 날 수 있는 건지, 나는 알지 못했다. 마치 계좌에서 항목 하나가 통째로 삭제된 것 같았다. 잔고는 그대로인데 거래 내역 한 줄이 사라진 것. 나는 확인하려고 다른 기억을 더듬었다. 대학 시절 친구들. 이름은 나왔다. 얼굴은 몇 개는 나왔다. 정재현, 웃을 때 앞니가 살짝 벌어지던 얼굴. 김하늘, 술을 마시면 목소리가 커지던 얼굴. 또렷했다. 고등학교 선생님. 이름도 얼굴도 나왔다. 담임이었던 최영수 선생님, 늘 회색 양복을 입고 다니던 그 모습이 그대로 떠올랐다. 그런데 엄마만, 오직 엄마의 얼굴만 사라져 있었다. 몇 번을 다시 시도했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고, 어릴 때 사진을 떠올리듯 애써봤다. 부엌에서 등을 보이고 서 있던 뒷모습. 그 뒷모습은 어렴풋이 그려졌다. 그런데 뒤돌았을 때의 얼굴을 그리려는 순간, 하얀 여백만 남았다. "왜." 입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하필." 대답해줄 사람이 없었다. 바람이 지나가며 옷깃을 스쳤다. 그 서늘함이 몸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내려가면서 마을 지붕들이 하나씩 그림자에 잠겼다. 촌장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여전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박덕수가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로 등을 벽에 기대고 서 있었다. "단검을 받았구나." "네." 내 목소리가 떨렸다. 말끝이 미묘하게 갈라졌다. 박덕수가 내 얼굴을 살폈다. 그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무슨 일 있었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 얼굴이 사라졌다고, 그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이 세계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면 뭐라고 답이 돌아올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정신이 이상해진 거라 여길지, 아니면 이 세계의 어떤 규칙 때문이라고 알려줄지. 둘 다 두려웠다. "아니에요." 겨우 그 말만 나왔다. 박덕수가 미간을 좁혔다. "얼굴이 하얗다." "괜찮아요." 거짓말이 입에서 매끄럽게 나갔다. 그게 스스로도 낯설었다. 박덕수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손에 든 단검을 힐끗 보고는 고개만 끄덕였다. "들어가서 쉬어라. 내일 아침에 다시 이야기하자." "네."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계속 떠올리려 애썼다. 엄마의 얼굴을. 식탁에 앉아 있던 자세. 반찬을 밀어주던 손의 방향. 그런 조각들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얼굴, 오직 얼굴만은 아무리 애써도, 하얀 안개만 떠올랐다. 안개 속에서 형체가 잡힐 듯 말 듯하다가 결국 흩어졌다. 눈물이 나야 하는데, 나오지 않았다. 대신 손끝만 계속 차가웠다. 나는 그 차가움을 손으로 감싸며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천장이 낯설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뒤로 계속 낯설던 천장이 오늘은 유독 더 낯설게 느껴졌다. 문득 시야 한 귀퉁이에서 뭔가가 아주 짧게 깜빡였다. 글자였다. 너무 빨리 사라져서 무슨 내용인지 읽을 수 없었다. 방금 그게 뭐였는지 확인하려고 다시 눈을 크게 떴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라는 그 말이 유독 불안하게 들렸다. 게임 지식은 맞았다. 아이템도 맞았다. NPC도 맞았다. 그런데 그 대가로 무언가가 계속 빠져나가고 있다면. 다음엔 무엇이 사라질지, 나는 알 수 없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