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어 방바닥에 길게 누웠다.
나는 눈을 반쯤 뜬 채 그 빛의 경계를 바라봤다.
먼지 알갱이 몇 개가 그 빛줄기 속에서 느릿느릿 떠다니고 있었다.
(오늘도 평화롭구나...)
청우 남작가의 아침은 언제나 이렇게 조용히 시작됐다.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렸고, 마당 어딘가에서 시종들이 오가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멀리서 우물가에 물동이가 부딪히는 소리도 났다.
익숙한 소리들이었다.
너무 익숙해서, 이제는 그 소리가 없으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이도훈이다.
적어도 지금은.
전생에는 도쿄 어딘가의 좁은 방에서 게임만 하던 평범한 일본인 대학생이었다는 사실은, 이 세계에 떨어진 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기억보다 이 삶이 더 익숙했다.
전생의 얼굴도, 이름도, 조금씩 흐릿해져 가는 중이었다.
그게 서글픈 일인지 다행인 일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마스터, 기상 시간입니다."
귓가에서 낮고 정갈한 음성이 울렸다.
설아였다.
군부 장교 복장을 한 그녀의 홀로그램이 침대 옆에 스르륵 떠올랐다.
푸르스름한 빛이 그녀의 실루엣을 따라 흘렀다.
매번 보는 모습이었지만, 아침마다 그 빛깔은 조금씩 다르게 느껴졌다.
"알아, 알아. 5분만..."
[불가능합니다. 이규한 님께서 오전 훈련을 요청하셨습니다.]
"5분이 그렇게 대단한 요구야?"
[마스터의 지각은 이미 3분 경과했습니다.]
나는 이불을 걷어차며 몸을 일으켰다.
뻐근한 어깨를 두드리며 창가로 다가섰다.
마당에는 이미 할아버지가 나와 계셨다.
지팡이를 짚은 채 서 있는 그 모습이 아침 안개 속에서 유독 단단해 보였다.
안개가 발밑을 감싸고 있었지만, 그 형체만은 흐트러짐 없이 또렷했다.
이규한.
청우 남작령의 영주이자, 수대에 걸쳐 이 땅의 정령 가호를 이어온 마술사.
그리고 내 할아버지였다.
나이는 이미 예순을 훌쩍 넘겼다고 들었지만, 그 등은 여전히 곧았다.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마당으로 나갔다.
찬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발밑의 흙은 아직 밤이슬로 젖어 있었다.
"늦었구나."
할아버지가 짧게 말했다.
낮고 다정한 어조였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됐다. 오늘은 정령력 순환부터 시작하자."
나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몸 안쪽 깊은 곳에서 미약한 파동이 일었다.
이 세계의 정령력은 마나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혈통을 타고 흐르는 힘이었고, 청우 가문의 피는 유독 그 파동에 민감했다.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이 감각을 다루는 것이 곧 가문의 힘을 다루는 것과 같다고 했다.
순환은 순조로웠다.
평소처럼 파동이 손끝을 따라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가슴에서 시작된 흐름이 팔을 타고 내려가, 손목을 지나 손끝에 닿는 그 감각은 언제나 물이 흐르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그런데.
삐걱—
미세한 이질감이 손목 안쪽을 스쳤다.
순환의 흐름이 아주 잠깐,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 어긋난 것 같았다.
마치 흐르던 물길에 작은 돌 하나가 걸려 잠깐 방향이 틀어지는 느낌이었다.
(방금... 뭐지?)
나는 눈을 뜨고 손을 내려다봤다.
아무 이상도 없어 보였다.
손끝은 평소와 똑같이 창백했고, 파동의 잔상 같은 것도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
할아버지가 물었다.
지팡이를 짚은 손끝이 살짝 움직였다.
"아니에요. 그냥 잠깐 흐름이 이상했던 것 같아서."
할아버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시선이 아주 짧게 내 손목에 머물렀던 것 같기도 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기분 탓일 거다. 계속해라."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손끝에 남은 미묘한 잔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물결 위에 낯선 파문 하나가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뒤로도 순환은 계속됐지만, 나는 손목 안쪽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훈련을 마쳤다.
훈련이 끝난 후, 나는 정원 구석 벤치에 앉아 숨을 돌렸다.
등에 밴 땀이 서늘한 바람에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설아, 방금 그거 뭐였을까."
[정확한 원인은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마스터의 정령력 순환 패턴에 0.3초간의 미세한 지연이 감지되었습니다.]
"지연? 그게 무슨 뜻인데."
[현재로서는 단순 노이즈로 분류하겠습니다. 추가 관측이 필요합니다.]
"노이즈라니, 그게 무슨 애매한 표현이야. 기계라면서 더 정확하게 말해줘."
[죄송합니다. 현 단계에서 확정적인 결론을 도출할 데이터가 부족합니다.]
설아의 대답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확답을 주지 않았다.
마치 어떤 벽이 있는 것처럼, 그녀는 특정 정보 앞에서 늘 한 걸음 물러섰다.
"너는 다 알면서 말 못 해주는 거지."
[개시 권한이 부족한 정보는 안내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권한이라... 누가 그 권한을 주는데?"
[해당 질문에 대한 답변 권한 역시 제한되어 있습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몇 조각이 느릿느릿 흘러가고 있었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햇살은 여전히 따뜻했고, 벤치 옆 화단에서는 이름 모를 작은 벌레들이 조용히 오갔다.
하지만 그 평화 속에서도 손끝에 남은 이질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점심 즈음, 양모인 이서연 님이 마당으로 나오셨다.
치맛자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고, 그녀의 걸음걸이는 언제나처럼 조용하면서도 단정했다.
그녀는 나를 보고 부드럽게 웃었다.
"도훈아, 훈련은 잘 끝났니?"
"네, 어머니."
"얼굴이 좀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요. 그냥 아침에 좀 늦게 일어나서요."
이서연 님은 그런 대답에도 별로 의심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오늘 저녁에는 시장에서 새로 들어온 과일이 있다더구나. 같이 먹자."
"좋아요."
"그래, 그럼 이따 보자."
짧은 대화였지만 그 안에 담긴 온기는 늘 나를 안심시켰다.
이서연 님은 이규한 남작의 장녀였고, 청우 가문에 후계가 없어 나를 양자로 들인 분이었다.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 이 집에서 나는 진짜 가족처럼 지내고 있었다.
그 온기는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내가 가장 먼저 붙잡은 것이었다.
오후에는 마을로 심부름을 나갔다.
청우 남작령의 중심 마을은 크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활기는 늘 넘쳤다.
대장간에서 쇳소리가 울렸고, 시장 골목에서는 상인들의 흥정 소리가 오갔다.
빵집 앞을 지날 때는 갓 구운 빵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나는 그 사이를 걸으며 익숙한 얼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도훈 님, 오늘도 심부름이십니까?"
채소 가판대의 아주머니가 웃으며 물었다.
"네, 어머니가 부탁하신 게 있어서요."
"저녁에 그 과일 좀 사가시려나. 오늘 아침에 들어왔는데 향이 아주 좋습니다."
"저도 그거 사러 가는 길이에요."
짧게 웃음을 나누고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골목, 익숙한 사람들, 익숙한 냄새.
이곳은 이제 내게 완전히 낯선 곳이 아니었다.
마을 외곽으로 향하는 길목에 다다랐을 때, 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숲의 경계, 묵림수해가 시작되는 그 어두운 나무들 사이에서 뭔가 움직인 것 같았다.
(뭐였지, 방금...)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응시했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었고, 벌레 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평소와 다를 게 없는 풍경이었다.
숲의 초입은 언제나 그렇듯 짙은 초록빛이었고, 그 안쪽으로 갈수록 색은 점점 검게 물들어갔다.
하지만 그 나무들 사이의 그늘, 유독 짙은 그림자가 진 자리에서, 나는 분명 무언가의 시선을 느꼈다.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감각이 훑고 지나갔다.
"설아, 저기 뭐가 있어?"
[열 감지 반경 내 이상 신호 없음. 다만 마스터의 정령력 센서에 미세한 간섭이 감지됩니다.]
"간섭이라니?"
[정체를 특정할 수 없는 낮은 수준의 파동입니다. 위협 등급은 산정되지 않았습니다.]
"아까 손목에서 느껴졌던 거랑 같은 거야?"
[유사한 파형입니다. 다만 발생 위치가 다릅니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숲을 바라봤다.
그림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빛줄기가 그림자의 경계를 흐릿하게 그려냈고, 그 경계 어디에도 사람이나 짐승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기분 탓이겠지... 아마도.)
나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마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등 뒤로 느껴지던 그 서늘한 감각은, 걸음을 옮기는 내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아직도 그 그늘 속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과일을 사서 돌아오는 길, 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숲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조용히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이, 오늘은 유독 낯설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