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정령 대신 AI라니, 이게 뭐야

3화

쿵. 거대한 충격음이 공기를 갈랐다. 눈을 떴을 때, 마수는 이미 몇 미터 뒤로 튕겨나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흙먼지가 뽀얗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사이, 낯익은 뒷모습이 나와 미르 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심장이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마수의 이빨이 코앞까지 다가왔던 감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할아버지..." 이규한 남작이었다. 지팡이는 어느새 손에 들려 있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끝에서 푸른빛이 일렁이며 허공에 복잡한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문양의 선이 하나씩 이어질 때마다 공기가 팽창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수가 다시 몸을 일으키며 낮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이미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방금까지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던 놈이었는데, 지금은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저 짧은 순간에... 뭘 한 거지.) 할아버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물러가라." 낮고 단정적인 목소리였다. 그 한마디에 담긴 위압감이 공기를 짓눌렀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도, 주위의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수는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몸을 돌려 숲 속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완전히 사라졌다. 정적이 흘렀다. 마을 사람들도, 나도, 숨을 죽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뒤돌아섰다. "다친 곳은 없느냐." "저는... 괜찮아요. 미르도요." 미르는 여전히 몸을 떨고 있었지만 다행히 상처는 없었다. 작은 몸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할아버지는 미르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어깨를 두드려줬다. "이제 안전하다. 부모님께 데려다주자." 그 짧은 배려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방금까지 마수를 단 한마디로 몰아낸 사람이, 지금은 어린아이를 다독이는 손길로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는 가슴을 쓸어내렸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장간 아저씨가 뛰어와 미르를 끌어안았다. "미르야! 미르야, 괜찮니!" 울음소리와 안도의 목소리가 뒤섞여 공터를 채웠다. 아이는 아버지의 품 안에서야 비로소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소란 속에서 조금 떨어져 서 있었다.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그랬다. 방어막을 펼쳤던 그 순간의 긴장이 아직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못 했어.)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 수, 그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마수를 몰아내는 모습이 자꾸 눈앞에 떠올랐다. 나는 방어막 하나로 겨우 버텼을 뿐인데, 할아버지는 압도적인 힘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 차이가 너무 명확했다. 나는 살아남는 데 급급했고, 할아버지는 상황을 지배했다. 같은 핏줄인데도,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흩어지고, 대장간 아저씨가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하는 동안에도,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방금 전 광경을 곱씹고 있었다. 그날 밤,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그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식탁 위의 국그릇에서 올라오는 김을 보면서도, 내 눈에는 여전히 푸른 문양이 아른거렸다. "도훈아, 오늘 정말 잘했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따뜻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걱정이 섞여 있었다. "미르를 구하려고 뛰어들었다는 이야기 들었어. 대단한 일이야."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아니었으면 큰일 났을 거예요." 나는 숟가락을 든 채로 잠시 멈췄다. "제가 한 건... 방어막 하나 펼친 게 다예요." 어머니는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할아버지는 조용히 식사를 하며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유독 크게 느껴졌다. 나를 나무라는 것도 아니고, 딱히 위로하는 것도 아닌, 그저 담담한 얼굴로 밥을 뜨고 있을 뿐이었다. 식사가 끝난 후, 나는 정원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빛이 유독 선명한 밤이었다. 바람이 서늘하게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낮에 있었던 일이 아직도 몸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설아." [네, 마스터.] "할아버지는...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이규한 님의 정령력 수치는 현재 측정 불가능한 상한선에 근접해 있습니다. 정확한 등급 산정이 어렵습니다.] 측정 불가능이라는 말이 유독 무겁게 다가왔다. 나는 벤치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차가운 밤공기가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대답 대신 짧은 정적이 흘렀다. 풀벌레 소리만 낮게 이어지고 있었다. [마스터에게는 이규한 님과 다른 종류의 잠재력이 있습니다. 다만 그 잠재력은 아직 개시되지 않았습니다.] "개시되지 않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현재 권한으로는 설명드릴 수 없습니다.] 또 그 대답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다시 올려다봤다. "설아, 너 그 말 벌써 몇 번째인지 알아?" [정확히는 이번이 다섯 번째입니다, 마스터.] "...굳이 세고 있었던 거야." [네, 마스터.]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답답함과 어이없음이 동시에 밀려왔지만, 그 짧은 대화 덕분인지 조금은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때, 낮은 발소리가 다가왔다. 할아버지였다. 지팡이 없이 걷는 걸음이 여전히 낯설게 느껴졌다. "아직 안 자느냐." "...잠이 안 와서요." 할아버지는 내 옆에 앉았다. 오래된 나무 벤치가 살짝 삐걱거렸다. 그 작은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오늘 일, 무섭지 않았느냐." "무서웠어요. 하지만 그보다... 제가 너무 약하다는 게 더 크게 느껴졌어요." 할아버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낮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놀림이 아니라, 어딘가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이 섞여 있었다. "너는 아직 열다섯이다. 급할 것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저 나이에도 이미..." "나도 처음부터 이렇지 않았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할아버지의 시선이 밤하늘 어딘가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힘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쌓인다. 중요한 건 오늘처럼, 지켜야 할 것 앞에서 몸이 먼저 움직였다는 것이다." "...제 몸은 도망칠 생각만 했는데요." "도망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짧게 말했다. "네가 미르 앞에 방어막을 세운 순간을 나도 봤다. 그건 계산해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슴 한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그 동경과, 동시에 스며드는 초라함이 뒤섞여 마음속에 남았다. 할아버지처럼 손끝 하나로 상황을 정리하는 날이, 나에게도 올까. 아니면 나는 영원히 방어막 뒤에서 떨고만 있는 사람일까. 그런 물음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동안, 할아버지는 내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어가서 쉬어라. 내일은 또 훈련이 있을 거다." "네..." 할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나는 오래도록 바라봤다. 그 걸음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그저 흔들림 없이, 언제나처럼 일정한 속도로 멀어져 갔다. 그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나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차가운 벤치의 감촉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낮에 보았던 푸른 문양의 잔상도 여전히 눈앞에 어른거렸다. "설아." [네, 마스터.] "그 잠재력이라는 거... 언제쯤 알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마스터.] "...뭐." [분명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말이 왜인지 서늘하게 느껴졌다. 좋은 예감인지, 나쁜 예감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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