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정령 대신 AI라니, 이게 뭐야

5화

다음 날 아침, 훈련을 마친 뒤 할아버지가 나를 서재로 따로 불렀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였다. 훈련장에서부터 그랬다. 목검을 거둬들이는 손짓이 평소보다 느렸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평소라면 해가 완전히 뜨기 전까지 이어졌을 훈련이 유독 짧게 끝났다. 땀을 닦아내며 훈련장을 나서는데,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훈아. 잠깐 서재로 오너라." 그 한마디에 발걸음이 멎었다. 할아버지는 그 말만 남기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나는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뒤따라 걸었다. 서재 안은 유독 조용했고, 커튼이 반쯤 쳐져 있어 그림자가 방 안 절반을 덮고 있었다. 책장 사이로 스며든 햇빛이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었지만, 그 빛조차 오늘은 이상하게 서늘하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아침 햇살에 반짝이던 책상 위 잉크병이, 오늘은 그저 무겁게 놓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앉아라." 나는 자리에 앉았다.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할아버지는 맞은편에 앉아 나를 오래 바라봤다. 그 시선이 길어질수록, 나는 괜히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뭔가... 평소랑 다르다.) "도훈아. 네가 이 가문에 온 지 몇 년이 지났지." "...일곱 살 때부터니까, 여덟 해쯤 됐어요." "그래. 그동안 너는 진짜 내 손자처럼 자랐다." 그 말투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무게가 느껴졌다. 평소의 할아버지라면 그런 말을 이렇게 신중하게 꺼내지 않았을 거다. 칼처럼 짧고 담백하게, 그리고 곧바로 다음 화제로 넘어갔을 텐데. "할아버지,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거죠." 할아버지는 짧게 웃었다. "눈치가 빠르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반쯤 쳐진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그의 옆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그림자는 마치 오래된 흉터처럼 얼굴 한쪽을 깊게 물들이고 있었다. 한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 어딘가를 바라보는 그 시선이,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훨씬 먼 과거 어딘가에 닿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청우 남작령은 설란 왕국의 동부 국경을 지키는 곳이다. 그 말은, 이 땅이 늘 위험과 맞닿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묵림수해 때문에요?" "그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할아버지는 뒤돌아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평소보다 깊고 진지했다. 나는 그 눈을 마주 보다가, 저절로 등이 조금 곧아지는 걸 느꼈다. "이 시스템, 브레이크오프 온라인은 단순한 유산이 아니다. 이 왕국, 아니 이 대륙 전체의 균형과 연결된 무언가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할아버지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상 모서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탁, 탁. 그 규칙적인 소리가 정적 속에서 유독 크게 들렸다. "초대 마스터가 이 시스템을 이 세계로 가져온 이후, 청우 가문은 대대로 이 힘을 관리하며 동부 국경을 지켜왔다. 단순히 영지를 다스리는 게 아니라, 이 시스템이 함부로 다른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지키는 역할도 함께 맡아온 거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머릿속으로 그 말을 몇 번이나 되새겼다. 청우 가문이 단순한 남작 가문이 아니었다는 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럼... 저는요?" 할아버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창밖에서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라면 그저 평온한 배경음이었을 그 소리가, 지금은 이상하게 낯설게 들렸다. 마치 그 소리 안에 뭔가 다른 파문이 섞여 있는 것처럼. "너는 이 시스템에 반응한 유일한 아이다. 설아가 너를 마스터로 인식한 그 순간부터, 너는 이미 이 흐름 안에 들어와 있었다." "제가 원래 이 가문 핏줄이 아닌데도요?" "핏줄과는 무관한 문제다. 이 시스템은... 뭔가 다른 기준으로 마스터를 선택한다." 정적이 흘렀다. 나는 손끝을 내려다봤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선택받았다는 건가. 왜 하필 나였을까.) 생부모를 잃고 이 가문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어쩌면 이미 정해져 있었던 걸까. 그 생각이 들자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다만 알아둬야 할 것들이 있어서 이렇게 부른 거다." "알아둬야 할 것들이요?" "그래. 네가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최소한은 알고 있어야지." 그 말에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책상 위에 놓인 낡은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동부 국경을 표시한 지도였고, 묵림수해 부근에 붉은 표식이 여러 개 찍혀 있었다. 그 표식들이 유독 눈에 밟혔다. "할아버지, 그럼 저는 이제 뭘 해야 하는 거예요?" 할아버지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의 표정에는 오랜 세월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곧 네게 맡길 일이 하나 있을 거다." "어떤 일이요?" 할아버지는 대답 대신 나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동부 국경, 그리고 이 시스템에 관한 일이다. 아직은 너에게 말해줄 준비가 다 되지 않았다." "할아버지..." "조급해하지 마라. 곧 때가 올 거다." 그 말을 끝으로 할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무겁게 울렸다. 나는 홀로 서재에 남아 오래도록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창밖의 빛은 어느새 그림자 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져 있었다. 책상 위 지도의 붉은 표식들이 그림자에 반쯤 잠겨가는 걸 나는 멍하니 바라봤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할아버지가 서 있던 그 자리였다. 반쯤 쳐진 커튼 사이로 밖을 내려다보니, 훈련장에서 병사들이 오가는 모습이 작게 보였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인데도, 오늘은 그 풍경 전체가 낯설게 느껴졌다. "설아." [네, 마스터.] "내가... 그냥 평범하게 살 수는 없었을까."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 질문에는 답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마스터의 선택 여부와 무관하게 이미 진행 중인 일들이 있다는 것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진행 중인 일이라니?" [최근 이규한 님의 개인 통신 기록에서, 왕도 방향으로 보낸 밀서 한 통이 감지되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밀서? 무슨 내용인데?" [해당 정보는 암호화되어 있어 상세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발신 대상은 왕국군 동부 사령부로 추정됩니다.] 등줄기로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언제 보내진 거야, 그거." [사흘 전입니다. 마스터께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신 직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흘 전.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나를 서재로 부르기 훨씬 전부터, 이미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할아버지가... 뭔가 준비하고 있는 건가.) 나는 다시 책상 위의 지도를 내려다봤다. 붉은 표식들 사이로, 왕도로 향하는 길이 얇은 선으로 그려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선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니, 손끝이 다시 미세하게 떨려왔다. "설아, 그 사령부 쪽에서 온 답신 같은 건 없어?" [현재까지 감지된 답신은 없습니다. 다만 통신 흔적의 빈도가 평소보다 잦아지고 있는 것은 확인됩니다.] "빈도가 잦아진다는 게... 무슨 뜻이야?" [정확한 해석은 어렵습니다. 다만 이런 패턴은 보통 뭔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타납니다.] 창밖으로 해가 완전히 그림자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방 안이 서서히 어둑해졌다. 나는 그 어둠 속에서, 아직 내게 말해지지 않은 무언가가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책상 위 지도의 붉은 표식들이 이제는 완전히 그림자에 잠겨, 어둠 속에서 그 존재만 겨우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오래 서서, 창밖을 바라봤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까와 똑같은 소리였는데도, 이번에는 그 소리 안에서 뭔가 삐걱거리는 듯한 낯선 파문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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