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정령 대신 AI라니, 이게 뭐야

4화

며칠이 지났다. 마을은 다시 평소의 활기를 되찾았다. 미르는 씩씩하게 골목을 뛰어다녔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또래 아이들과 함께 웃음소리를 흘렸다. 대장간 아저씨는 나를 볼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고맙다는 말을 몇 번씩 반복했다. "도련님 덕분에 우리 미르가... 정말이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딱히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 진심 어린 감사만큼은 매번 낯설고 어쩐지 따스했다. 마을 어귀의 우물가에서는 아주머니들이 모여 빨래를 하며 지난번 사건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대화 속에 내 이름이 섞여 들릴 때면, 나는 괜히 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이런 종류의 관심은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날 오후, 나는 서재에서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청우 남작가의 서재는 오래된 책 냄새와 함께 은은한 빛이 스며드는 공간이었다. 높은 책장마다 가죽으로 장정된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고, 창문 틈으로 들어온 오후의 햇살이 먼지 알갱이를 은은하게 비추며 떠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손끝으로 책등을 훑으며 걷다가, 마침내 낡은 검술서 하나를 꺼내 책상에 펼쳐놓았다. 글자를 읽는 척했지만 실은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요 며칠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질문이 있었다. 나는 결국 그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설아, 궁금한 게 있어." [말씀하세요, 마스터.] "내가 물려받은 이 시스템... 정식 명칭이 뭐야?" 짧은 정적이 흘렀다. 책장 사이로 스며든 빛이 잠시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해당 정보는 개시 권한 3단계 이상이 필요합니다. 현재 마스터의 권한은 1단계입니다.] "음... 그럼 알려줄 수 있는 것만 말해줘." [알겠습니다.] 설아의 홀로그램이 서재 한복판에 떠올랐다. 그녀 주변으로 푸른빛의 문자들이 빙글빙글 돌며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마치 물속에서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 떼처럼, 문자들은 일정한 궤적을 그리며 서재의 공기를 은은하게 물들였다. [제가 탑재된 시스템의 이름은 '브레이크오프 온라인'입니다. 원래는 지구라는 세계에서 개발된 온라인 게임의 통합 관제 시스템이었습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책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구? 게임?" 전생의 기억이 순간적으로 스쳤다. 도쿄의 좁은 방, 모니터 앞에서 밤을 새우던 나날들. 싸구려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화면 불빛만 응시하던 그 시절의 감각이, 아주 오랜만에 손끝까지 되살아났다. 그때 즐겼던 게임들 중에도 비슷한 이름이 있었던가. 머릿속으로 몇 개의 제목을 떠올려봤지만 어느 것도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이건... 내가 알던 그 어떤 게임과도 달라.) 이름은 낯설었고, 그 낯섦이 오히려 신경을 곤두세웠다. [정확히는, 이 시스템은 초대 마스터께서 지구에서 이 세계로 이전해오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과정에 대한 상세 기록은 봉인되어 있습니다.] "초대 마스터라니. 그게 누군데."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떨렸다. [이규한 님의 조부, 즉 마스터의 고조부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책상 위의 검술서 페이지가 바람도 없이 살짝 넘어갔다. 그 작은 움직임조차 이상하게 크게 느껴졌다. "...일본인이었어?" [해당 정보 역시 부분적으로만 열람 가능합니다. 초대 마스터의 국적은 일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등줄기로 서늘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서재의 공기가 갑자기 몇 도쯤 낮아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설마... 나처럼 전생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그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치자,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고, 나는 그것을 감추려 책상 모서리를 슬며시 움켜쥐었다. 나는 이 세계에 떨어진 유일한 존재가 아니었던 걸까. 그 생각 하나로 지금까지 쌓아온 확신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듯했다. "설아, 초대 마스터도 나 같은 경우였어? 원래 다른 세계에서 온?" [해당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제 권한 밖입니다.] "제발, 이거 하나만 알려줘. 중요한 거야."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절박함이 섞여 나왔다. [죄송합니다, 마스터. 이 정보는 이규한 님 또는 그 이상의 권한자만 개시할 수 있습니다.] 나는 책상에 손을 짚고 고개를 떨궜다. 답답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어봤지만, 가슴 한복판에 얹힌 무언가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 서재 문이 열렸다. 탁. 문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할아버지였다. 낮은 목소리, 단정한 걸음걸이. "설아와 이야기 중이었느냐." "네... 시스템에 대해서 좀 물어봤어요." 할아버지는 책장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다가왔다. 그 발걸음마다 오후의 빛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궁금한 게 많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 알려줄 수 없다." "왜요?" "아직 준비가 안 됐으니까." 할아버지의 표정이 평소보다 조금 더 무거워 보였다. 주름진 눈가에 스치는 그늘이, 평소의 온화함과는 다른 결을 그리고 있었다. "이 시스템, 이 세계에는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가문을 지금까지 지켜온 것도 사실이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할아버지는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오후의 햇살이 창틀 사이로 길게 스며들고 있었다. 먼지 알갱이들이 그 빛 속에서 느리게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다. 지금은 훈련에 집중해라." 그 말에는 더 이상의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뭔가 더 묻고 싶었지만, 할아버지의 눈빛이 그 모든 말을 삼켜버렸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속 의문은 오히려 더 커져 있었다. (브레이크오프 온라인. 초대 마스터. 지구...) 이 모든 조각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조각들이 언젠가 나 자신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은, 왠지 확신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서재를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오래 귓가에 남았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창밖에서는 풀벌레 울음소리가 낮게 깔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 소리가 마음을 가라앉히는 배경이 되어주었을 텐데, 오늘은 어쩐지 그 울음소리마저 미묘하게 어긋난 파문처럼 들렸다. "설아,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 [네, 마스터.] "내가... 진짜 이 가문의 핏줄이 아니라는 거, 다들 알고 있는 거지?" 짧은 정적이 흘렀다. 방 안의 공기가 잠시 멈춘 듯했다. [그 정보는 마스터의 개인 신상 기록에 포함되어 있으나, 제 권한으로 상세히 설명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냥... 궁금해서." 나는 눈을 감았다. 생부모의 얼굴은 이제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아주 어린 시절, 화재였는지 사고였는지,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흐릿했다. 기억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걸까, 아니면 일부러 지워진 걸까, 그런 의문마저 요즘은 새삼스레 고개를 들었다. 다만 그 이후로 이 가문에 들어와 자랐다는 사실만이 선명했다. 할아버지의 손, 처음 이 저택에 들어섰을 때의 낯선 복도, 그리고 낯선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그날의 기억. (나는 대체 누구일까.) 그 질문은 오늘도 답을 얻지 못한 채, 천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뒤척이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설아의 홀로그램은 이미 사라진 뒤였지만, 방 안에는 여전히 희미한 푸른빛의 잔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잔상을 눈으로 좇다가, 나는 결국 아무 답도 찾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내일이 되면 또 훈련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 훈련 속에서, 언젠가는 이 모든 조각들이 하나로 맞춰질 날이 올 거라는 예감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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