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정령 대신 AI라니, 이게 뭐야

2화

다음 날 오후, 나는 또 심부름을 나섰다. 어머니가 부탁하신 약초를 사러 마을 외곽 약재상까지 가는 길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 어머니는 종이에 적은 약초 이름을 몇 번이고 확인시켜 주셨다. "백리향 뿌리랑, 청단초 잎사귀 세 장. 잊지 말고." 나는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맑았다. 바람은 산들거렸고, 길가의 들꽃들이 흔들렸다. 하지만 어제 느꼈던 그 서늘한 감각이 자꾸 뒷목을 잡아끄는 것 같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흙먼지가 살짝 일었다. 멀리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평화롭기 짝이 없는 풍경이었는데도, 나는 자꾸 고개를 돌려 숲 쪽을 바라보게 됐다. (그냥 기분 탓이겠지.) 약재상 주인아저씨는 늘 그렇듯 넉살 좋게 나를 맞아주셨다. "오, 오늘도 왔구나. 어머니는 잘 계시고?" "네, 안 그래도 오늘은 백리향 뿌리랑 청단초 부탁하셨어요." 아저씨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약초를 골라 종이에 싸주셨다. 나는 값을 치르고 인사를 한 뒤 다시 길을 나섰다. 약재상에 도착해 물건을 받고 돌아서는 길, 마을 아이들이 모여 노는 공터를 지나쳤다. 아이들은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 그 중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미르였다. 대장간 아저씨의 딸로, 나보다 두 살 어린 여자아이였다. "오빠!" 미르가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치맛자락에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오늘도 어머니 심부름이야?" "응. 너는 여기서 뭐 해?" "친구들이랑 놀다가, 숲 쪽에 예쁜 꽃이 있다고 해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숲 쪽? 어디까지 갔었는데?" "저기 경계선 근처까지만. 걱정 마, 안 들어갔어." 미르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묵림수해의 경계는 마을 사람들에게조차 위험한 곳이었다. 그 안쪽에서는 종종 마수의 흔적이 발견되곤 했고, 어른들도 함부로 가까이 가지 않았다. "미르, 다음부터는 그쪽 가지 마. 알겠지?" "알겠어~ 오빠는 걱정이 많다니까." 미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다시 친구들 쪽으로 뛰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등줄기를 스치는 그 서늘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저녁, 나는 방에서 훈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방 안에는 정령력의 흐름을 가늠하는 작은 구슬 몇 개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하나씩 구슬을 굴리며 정령력을 흘려 넣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마스터, 지금 순환 속도가 평소보다 12퍼센트 느립니다.] 설아의 목소리가 방 안에 조용히 울렸다. "알아. 오늘은 좀... 집중이 잘 안 되네."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아니, 그냥." 나는 구슬 하나를 다시 굴렸다. 푸른빛이 손끝에서 옅게 맴돌았다. 창밖에서는 풀벌레 소리가 하나둘 들려오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평온한 저녁이었다. 그때였다. [마스터. 마을 외곽에서 비정상적인 열 신호가 감지됩니다.] 설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딱딱하게 들렸다. "어디?" [대장간 인근, 숲 경계 지역입니다. 신호가 급격히 확산되고 있습니다.]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미르가 그쪽에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신호 강도는 어느 정도야?" [현재 측정 가능한 범위를 초과하고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상승 중입니다.] 손끝에 맴돌던 푸른빛이 흔들렸다. 구슬이 바닥을 굴러 떨어졌다. 탁. 나는 방을 뛰쳐나갔다. 계단을 두 칸씩 뛰어내렸다. 발이 마룻바닥에 닿을 때마다 둔한 진동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할아버지는?" [남작님께서는 현재 영지 남부에서 회의 중이십니다. 즉시 연락을 시도하겠습니다.] "연락은 됐고, 지금 나 혼자 가야겠어." [비추천입니다. 위협 수준이 미확인입니다.] "미르가 거기 있어." 짧은 정적이 흘렀다. [알겠습니다. 최소한의 보조 장비를 활성화하겠습니다.] 설아의 목소리에서 망설임이 느껴졌지만, 더 이상의 만류는 없었다. 손목 안쪽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보조 장비가 활성화되는 신호였다. 나는 대문을 박차고 나가 마을 쪽으로 내달렸다. 발끝이 흙길을 파고들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길가의 들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게 시야 가장자리로 스쳐 지나갔다. 평소라면 눈에 담았을 풍경이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 이미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아이의 손을 잡고 반대 방향으로 뛰었고, 누군가는 넘어진 채 엉금엉금 기어 도망치고 있었다. 대장간 근처 공터,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른 그 자리에 검붉은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 키의 두 배쯤 되는, 늑대와 도마뱀을 섞은 듯한 형태의 마수였다. 피부는 검붉은색이었고, 등줄기를 따라 뾰족한 돌기가 솟아 있었다. 눈은 붉게 빛나고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콧구멍에서 검은 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아래, 겁에 질려 몸을 웅크린 미르가 있었다. 아이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채 미동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르!" 나는 반사적으로 뛰어들었다. [마스터, 대상의 위협 등급은 C급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마수가 앞발을 들어 미르를 향해 내려찍으려는 순간, 나는 몸을 던져 그녀를 밀쳐냈다. 퍽. 어깨에 둔한 충격이 퍼졌다. 발톱이 옷깃을 찢고 스쳤다. 뜨끈한 통증이 팔뚝을 따라 흘렀다. 피가 옷자락을 타고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괜찮아?!" 미르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눈동자에는 여전히 겁에 질린 빛이 가득했다.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 알겠지?" 미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손목을 뒤로 돌려 정령력을 끌어올렸다. 손끝에 푸른빛이 맺혔다. 간단한 방어막이었다. 할아버지에게 배운 것 중 가장 기초적인 술식이었다. (이 정도로... 버틸 수 있을까.) 마수가 다시 몸을 낮추며 도약할 준비를 했다. 등줄기의 돌기들이 조금씩 곤두서는 게 보였다. 나는 미르를 등 뒤로 밀어내며 방어막을 넓게 펼쳤다. 쿵. 마수의 몸통이 방어막에 부딪혔다. 막은 버텼지만, 그 충격으로 내 몸이 뒤로 밀려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 눈가로 스며들었다. [마스터. 방어막의 내구도가 임계치에 근접했습니다.] "알아... 알고 있어." 나는 이를 악물었다. 손끝에서 힘이 조금씩 새어 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 힘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추가 정령력 공급이 필요합니다. 현재 마스터의 보유량은 34퍼센트입니다.] "그럼... 어떻게든 아껴 써야겠네." 마수가 다시 발톱을 세우며 달려들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옆으로 몸을 굴렸다. 어깨의 상처가 바닥에 눌리며 통증이 터졌다. 하지만 발끝이 흙에 걸리며 균형을 잃었다. (안 돼...) 마수의 그림자가 눈앞을 덮쳤다. 붉은 눈동자가 코앞까지 다가온 게 보였다. 나는 팔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직감했다.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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