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나는 서은채다.
올해로 열여섯이 되었고, 하율마을 촌장의 외동딸이다.
다만 이 몸으로 살아온 기억과, 이 몸 이전의 기억이 함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조금 다르다.
전생에서 나는 중년의 남자였다. 이름도, 얼굴도 이제는 흐릿하지만, 그 삶의 방식만은 몸 깊숙한 곳에 남아 있었다. 서은채로 눈을 뜬 순간부터 그랬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를 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이 세계의 구조를 계산하고 있었으니까.
'어떤 세상인지는 몰라도, 일단 살아야겠지.'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늘 그런 식으로 생각해왔다.
하율마을은 변경에 속한 작은 정착지였다.
마을 바깥으로는 마물이 출몰하는 황무지가 펼쳐져 있었고, 마을들은 서로 힘을 합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결속을 다지는 방법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혼인이었다.
촌장의 자식은 다른 마을의 유력자와 혼인하여 두 마을을 잇는 다리가 된다. 그것이 이곳의 법이자 관습이었다.
나는 그 다리가 될 운명으로 태어났다.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열 살이었다. 놀랍게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전생의 습관이었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계산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침이면 나는 우물가로 나가 물을 길었다.
두레박을 끌어올릴 때마다 손끝에서 미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것은 힘이었다. 남들에게는 없는, 나만 가진 낯선 감각.
감정이 격해지면 그 힘은 제멋대로 새어나왔다. 물그릇이 떨리거나, 바람이 없는데도 나뭇잎이 흔들리거나.
언젠가 화가 났던 날엔, 부엌 항아리가 이유 없이 쩍 갈라진 적도 있었다. 그날 나는 사흘 동안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 힘을 숨기며 살았다. 열여섯 해 동안 단 한 번도 온전히 드러낸 적이 없었다.
'괜히 눈에 띄어봤자 좋을 게 없지.'
전생의 습관이었다.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필요한 순간에만 움직인다.
그것이 이 낯선 세계에서 내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그날은 여느 아침과 다르지 않았다.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아버지의 아침상을 차리고, 마을 어귀에 나가 밭을 살폈다.
밭에는 감자 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흙을 만지며 나는 잠시 딴생각을 했다.
'올해도 수확이 나쁘진 않겠어.'
그런 사소한 계산들이 내 하루를 채웠다. 전생의 버릇대로.
아버지, 서만석은 하율마을의 촌장이었다.
마흔을 넘긴 얼굴에는 늘 피로가 얹혀 있었다. 그 피로의 대부분은 나 때문이라는 걸,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촌장이라는 자리가 다정함만으로 버텨지는 자리는 아니었다. 마을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딸의 혼사조차 계산해야 하는 자리였다.
나는 그걸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해했다. 전생에서 나도 그런 식으로 살았으니까.
"은채야."
밭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네, 아버지."
"오늘 청하마을에서 사람이 왔다."
청하마을이라면 하율마을에서 이틀 거리에 있는 큰 정착지였다. 그쪽은 물자가 풍족했고, 병력도 갖추고 있었다. 우리 마을이 오래전부터 눈여겨보던 상대였다.
그리고 그만큼 조건이 까다로운 상대이기도 했다. 그쪽에서 먼저 사람을 보냈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나는 손에 든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무슨 일로요?"
아버지는 대답 대신 품 속에서 서찰 하나를 꺼냈다.
종이가 접힌 모양이 단정했다. 관에서 쓰는 필체로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윤도현.
"청하마을 이장의 아들이다. 올해 열넷이지."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열넷.
나보다 두 살이나 어렸다.
'열넷이라니. 그럼 나보다 어리다는 소린데.'
머릿속으로 계산이 빠르게 굴러갔다. 두 살 차이가 크게 문제 될 건 아니었다. 이 마을에서는 흔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마음 어딘가가 이상하게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혼약이 성사됐다. 다음 계절에 예를 갖춘다더구나."
아버지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마치 유리를 다루듯이.
나는 서찰을 받아 들었다. 종이의 무게는 가벼웠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은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손안에서 종이가 파삭, 소리를 내며 살짝 그슬려 있었다.
나는 얼른 서찰을 내려놓았다.
'……지금 이건, 놀랄 상황도 아닌데.'
마을 존속을 위해 결혼을 받아들이겠다고 마음의 준비를 해온 지 벌써 몇 해였다. 상대가 누구든 놀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왜 이러지, 나답지 않게.'
나는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미세하게 열기가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다. 이해해다오."
"……괜찮아요, 아버지."
목소리는 담담하게 나왔다. 다행이었다.
그 말을 남기고 아버지는 방을 나갔다.
나는 혼자 남아 그슬린 서찰의 끝을 매만졌다.
종이 가장자리가 까맣게 타들어간 자국이 선명했다. 마치 내 안의 무언가가 억눌린 채로 밖으로 새어나온 흔적 같았다.
'윤도현.'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얼굴도 모르는 이름이었다.
'그래도 별수 없지. 이곳에서 태어난 이상, 이 정도는 각오했던 일이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가슴 한구석은 여전히 서늘했다.
창밖으로는 저물어가는 하늘이 붉게 번지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칠 소리였다.
그런데 오늘은 어딘가 소란스러웠다. 개들이 유난히 크게, 그리고 오래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 사이로, 낯선 말발굽 소리가 섞여 들려오고 있었다.
'……누구지?'
이 시간에 마을을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청하마을에서 온 사람이라면 이미 낮에 다녀갔을 터였다.
나는 창가로 다가섰다.
마을 어귀에 낯선 인영 하나가 서 있었다. 갑주를 걸친 남자였다.
먼 거리였지만, 그 실루엣이 이상하게도 낯익었다.
어깨의 각도, 서 있는 자세, 심지어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방식까지도.
심장이 이유도 없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몸이 먼저 그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손끝에서 다시 그 떨림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서찰을 태울 때보다 훨씬 강했다.
탁자 위에 놓인 촛불이 바람도 없이 크게 흔들렸다.
나는 숨을 삼켰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갑주를 걸친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