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밖으로 보였던 그 갑주 차림의 남자는 마을 여관에 묵는다고 했다.
방 안은 어두웠다.
달빛만이 창틀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와 이불 위에 얇은 선을 그리고 있었다.
몸을 뒤척였다.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았고, 눈을 뜨면 천장의 나뭇결만 눈에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벌써 소문이 돌고 있었다.
왕국 기사단에서 온 손님이라는 이야기, 그것도 하율마을 출신이라는 이야기.
낮에 우물가에서 아주머니들이 나누던 대화가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기사님이 여기 오셨다는 게 말이 돼? 우리 같은 시골 마을에?"
"그러니까 말이야. 근데 얼굴이 낯설지 않다니까."
"낯설지 않긴 뭐가 낯설지 않아. 처음 보는 얼굴이던데."
그 목소리들 중 누구도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소문의 의미를 정확히는 몰랐다.
다만 가슴 한쪽이 자꾸 뻐근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이었다.
아니, 이유를 알고 싶지 않은 통증이었는지도 모른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겨우 눈을 붙였다.
아침이 되자 아버지의 표정은 어제보다 더 굳어 있었다.
식탁 위에 놓인 죽은 이미 식어 있었고, 아버지는 그것을 뜨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숟가락이 그릇 바닥을 긁는 소리만 방 안에 울렸다.
"아버지, 어제 그 서찰 말인데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숟가락을 쥔 아버지의 손이 잠시 멈췄다.
"왜 하필 지금이에요? 청하마을과의 이야기는 예전부터 있었잖아요."
그동안 몇 번이나 오갔던 이야기였다.
성사되었다가 무산되고, 다시 거론되다가 흐지부지되던 혼담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달랐다.
아버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이번엔 확정이다. 미룰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어떤 사정이요?"
나는 그릇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우리 마을의 빚이 얼마인지 아느냐."
나는 그 말에 숨을 삼켰다.
빚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았다.
마을을 운영하며 서만석이 짊어진 부채는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흉년, 마물 피해, 그리고 그 모든 걸 메우기 위한 다른 마을과의 협상.
작년에도 곡식이 부족해 옆 마을에서 빌려 온 일이 있었고, 재작년에는 마물이 밭을 헤집어 놓아 수확량의 절반을 잃었다.
그런 일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빚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짐작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투에는 그 이상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단순한 흉년의 부채가 아니라는 듯, 말 사이사이에 뭔가를 억누르는 기색이 있었다.
"청하마을과의 혼사가 성사되면, 그 빚의 절반이 정리된다."
"절반이요?"
"은채야, 나는 너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구나."
아버지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평생 촌장으로서 흔들림 없던 그 목소리가 이렇게 흔들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절반이라니. 나머지 절반은 뭐지.'
전생자의 습관대로 나는 그 말의 이면을 계산하고 있었다.
절반이 정리된다면, 나머지 절반은 대체 무엇으로 메울 생각인가.
혼사 하나로 마을의 존망이 갈린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그 빚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마을 전체를 짓누르는 사슬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나머지 절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나는 다시 물으려 입을 열었다.
"그럼 나머지 절반은—"
그러나 아버지는 그 물음이 나오기 전에 자리를 피했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식어버린 죽을 내려다보며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십 년 전, 내가 여섯 살이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하율마을 어귀 숲에서 마물이 나타난 밤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달이 밝았고, 나는 어른들 몰래 숲에 숨어들었다가 마물과 마주쳤다.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던 그 순간, 짐승의 눈이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고 있었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발밑의 흙냄새와 마물의 비린내가 뒤섞여 코를 찔렀고, 그르륵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 순간, 열네 살이던 소년 하나가 뛰어들어 나를 감싸 안았다.
그 소년의 이름이 강태윤이었다.
마물의 발톱이 내 어깨를 스쳤다.
상처는 깊었고, 지금도 흉터로 남아 있었다.
강태윤은 나를 구한 뒤 크게 다쳐 마을을 떠났다.
그 뒤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 강덕호, 강태윤의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종종 분노를 터뜨렸다고 들었다.
"촌장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딸을 지키지 못해서 내 아들을 다치게 만들어!"
그 말을 전해 들었을 때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들이 다친 것을 두고 촌장을 원망하는 목소리였다.
그것이 아버지가 말한 빚의 나머지 절반일지도 몰랐다.
나는 어깨의 흉터를 옷 위로 문질렀다.
손끝에 오래된 흉터의 결이 느껴졌다.
'십 년이나 지났는데.'
그런데 왜 지금, 그 이름이 다시 떠오르는 걸까.
마을 밖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님이다! 진짜 기사님이야!"
"우와, 검이 진짜 크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어제 보았던 갑주 차림의 남자가 마을 중앙 광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짧게 정돈되어 있었고, 눈빛은 서늘했다.
걸음걸이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등에 걸친 검은 아침 햇살을 받아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주위로 모여들며 수군거렸다.
"강씨네 아들 아닌가?"
"저 얼굴… 강태윤이잖아."
"세상에, 그 애가 저렇게 컸다고?"
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창틀이 미세하게 떨리며 나무 표면에 잔금이 갔다.
지지직, 낮은 소리가 손끝에서 새어 나왔다.
'……돌아왔어.'
십 년 전 그날의 은혜가,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동시에 목 끝까지 차올랐다.
기쁨인지, 두려움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 복잡한 무엇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급히 창가에서 물러섰다.
숨이 가빠졌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곧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우리 집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발소리가 마당 앞에서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