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날 이후, 아버지는 며칠 동안 나를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다.
식사 자리에서도 시선을 피했고, 국그릇에 숟가락을 넣었다 뺐다만 반복했다.
밭일을 나가는 시간도 평소보다 훨씬 길어졌다.
해가 다 저물어서야 흙 묻은 손으로 돌아오는 날이 늘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목 안쪽이 답답해졌다.
말을 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 고민만 며칠을 반복했다.
'분명히 뭔가 있어. 저렇게 눈을 피하는 건 처음 봤는데.'
결국 나는 그 침묵을 견디다 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녁상을 물린 뒤였다.
"아버지, 강태윤 말대로예요? 이 결혼, 아버지가 정한 거예요?"
아버지의 손이 잠시 멈췄다.
숟가락을 든 채로, 허공을 보는 채로.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
짧은 한 마디였는데도, 그 무게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왜요?"
"청하마을의 도움 없이는 이 마을이 올겨울을 넘기기 힘들다. 그건 너도 알지 않느냐."
알고 있었다.
올여름 가뭄이 유독 심했고, 곡식 창고는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그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마을에 없었다.
"그건 알아요. 하지만 그것 말고, 강태윤네 집안이랑 무슨 사정이 있는 거예요? 그냥 도움을 청하는 것과, 저를 그 집 아들한테 시집보내는 건 다르잖아요."
아버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등불 아래에서도 그 낯빛이 확연히 드러났다.
한참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쪽 벽장을 열었다.
그 안쪽 깊숙한 곳에서 낡은 목갑 하나를 꺼내 왔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목갑이었다.
뚜껑을 열자 안에는 누렇게 변색된 서류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십 년 전, 강태윤이 너를 구했을 때, 그 아이는 크게 다쳤다."
나는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을에는 그 아이를 치료할 약재도, 돈도 없었지. 나는 강덕호에게 빚을 졌다. 태윤이의 치료비, 그리고 그 이후 그 아이가 기사가 될 때까지 들어간 돈까지."
나는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붓으로 적힌 숫자가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었다.
농사만 지어서는 몇 년을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액수였다.
'……이게, 그때 그 일 때문에?'
가슴이 서서히 무거워졌다.
"그 빚을, 청하마을과의 혼사로 갚으려는 거예요?"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하지만 청하마을과 손을 잡으면, 그 빚도 갚을 여력이 생긴다. 강덕호에게도 이미 그렇게 전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오히려 머릿속이 더 어지러워졌다.
'그러니까, 강태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결혼과 엮여 있었던 거네.'
'십 년 전, 나를 구한 대가로 자기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줬고, 그 빚이 지금 이렇게 돌아온 거야.'
채무와 혼사가 이렇게 뒤엉켜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강덕호는 알고 있어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처음엔 반대하지 않았어. 그런데 태윤이가 돌아온 뒤로는……"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 전에, 대문 밖에서 거센 발소리가 들려왔다.
땅을 쿵쿵 내리찍는 듯한 발소리였다.
"서만석!"
문이 벌컥 열렸다.
경첩이 뜯길 듯한 소리를 내며 마당 안으로 바람이 밀려들었다.
중년의 남자 하나가 성큼 마당으로 들어섰다.
어깨가 넓고 팔뚝에는 굵은 흉터가 여러 개 있었다.
목덜미까지 검게 그을린 피부였다.
눈빛은 강태윤을 닮았지만, 훨씬 거칠었고 훨씬 사나웠다.
강덕호였다.
"이야기 들었소. 내 아들이 저 계집 때문에 지금도 이 지경이라는 걸."
그의 목소리가 마당을 뒤흔들었다.
낮게 깔린 저음인데도, 그 안에 담긴 날카로움이 살갗을 스치는 듯했다.
"강덕호, 말을 가려서 하시오."
아버지가 낮게 응대했다.
"가려서 할 말이 있소? 십 년 전에도, 지금도, 당신 딸 때문에 내 아들이 이 꼴이 됐어!"
나는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 탓이라고?'
숨이 얕게 가빠지는 게 느껴졌다.
목갑 속 서류의 숫자들이 눈앞에서 다시 어지럽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강덕호가 나를 쏘아보았다.
"너, 태윤이한테 뭐라고 했느냐. 걔가 요즘 왜 저러는지 아느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목 안이 바짝 말라,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강덕호의 뒤편으로 강태윤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갑주는 벗은 상태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걸음걸이가 평소보다 느렸다.
"아버지, 그만하세요."
강태윤이 낮게 말했다.
"그만하라니! 넌 저 계집 하나 때문에 십 년 동안 여기 발도 안 들여놓지 않았느냐!"
마당의 공기가 다시 팽팽해졌다.
나는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손끝에서 다시 그 낯선 떨림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주 미세한, 전기가 흐르는 듯한 떨림이었다.
'지금은 안 돼. 여기서, 이 앞에서는 안 돼.'
나는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며 애써 진정하려 했다.
손톱 끝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세게 쥐었다.
강덕호가 나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땅을 밟는 무게가 그대로 전해질 만큼 큰 걸음이었다.
"내 아들은 어차피 네 결혼 상대가 아니니, 이제 그만 신경 끄고 살아라. 알겠느냐?"
그 순간, 강태윤이 아버지의 팔을 붙잡았다.
"아버지, 지금 그 말씀은—"
"놔라!"
강덕호가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 힘에 강태윤의 몸이 뒤로 밀렸다.
두 부자의 언성이 마당을 가득 채웠다.
낡은 담벼락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놀라 날아올랐다.
나는 그 소란 한가운데 서서, 아버지가 몰래 감추고 있던 목갑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 안의 숫자가 문득 무겁게 느껴졌다.
'이 숫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얽혀 있는 거야.'
손끝의 떨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