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 몸에 무공서가 있었다니

2화

다음 날 아침, 강태웅은 대장로전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그의 걸음걸이에는 평소와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으며, 그 뒤를 따르는 시종들 역시 감히 입을 열지 못한 채 조용히 발을 맞추고 있었다. 새벽 이슬이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정원의 돌길을 밟는 그의 발소리마저, 오늘만큼은 유난히 크게 울리는 듯했다. 지나치는 하인들이 하나둘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였으나, 강태웅의 시선은 오직 앞만을 향해 있었다. 그 눈빛 속에는 이미 오늘 있을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짐작하는 자의 무거움이 담겨 있었다. 대장로전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을 오르며,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서야 안으로 발을 들였다. 대장로전 안에는 이미 대장로를 비롯한 여러 원로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좌우로 늘어선 태사의 위에 앉은 원로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굳어 있었으되 그 속내는 저마다 달랐다. 강태웅이 들어서자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쏟아졌으나, 그 시선 속에는 예우보다는 냉담함이 더 짙게 깔려 있었다. 누군가는 동정하는 눈빛을 보냈으나, 그 동정마저 이내 무관심으로 바뀌었다. "족장." 대장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으나, 그 눈빛만큼은 젊은이보다 매서웠다. 오랜 세월 강씨 가문의 흥망을 지켜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서늘하고도 노회한 눈빛이었다. "강씨 가문의 규율을 다시 상기시켜드릴 필요가 있겠소?" "규율은 이미 알고 있소." 강태웅이 담담히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으나, 손끝은 옷자락 속에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지키지 못하시는 게요." 대장로 옆에 앉은 다른 원로가 끼어들었다. 강경호, 강태웅의 형이자 강범의 아버지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겉으로는 예의를 갖춘 듯했으나, 그 아래 숨겨진 조롱은 숨기지 못했다. "족장의 자리에 오른 자의 후계자가 열일곱이 되도록 파범경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것은, 강씨 가문의 체면을 온 무림에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 아니오?" 강태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반박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대장로파는 이미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처럼, 한마디 한마디에 준비된 칼날을 숨기고 있었다. 좌중에 앉은 다른 원로 몇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것이, 강태웅의 눈에 들어오지 않을 리 없었다. 저들 사이에 이미 오간 밀담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그는 굳이 확인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족장께서도 아시겠지만," 강경호가 말을 이었다. "강씨 가문이 어디 그저 그런 가문이었소이까. 대대로 열 살 전후면 파범경을 넘던 것이 우리 가문의 전통이었소. 그런데 지금, 족장의 하나뿐인 아들이 열일곱이 되어서도 그 벽을 넘지 못했다는 것은..." 그는 짐짓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으나, 그 입가에 걸린 미소는 감추지 못했다. "가문 전체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 아니겠소." "형님." 강태웅이 처음으로 그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하늘이는 아직 어립니다. 시간이 더 필요할 뿐입니다." "시간?" 강경호가 코웃음을 쳤다. "그 시간을 이미 이 년이나 더 주었잖소. 언제까지 미룰 셈이오. 원로회의 인내심도 무한하지 않소이다." "사흘 뒤 조상 제사가 있소." 대장로가 말을 이었다. 그 목소리는 마치 이미 정해진 판결을 낭독하는 것처럼 건조했다. "그날 강하늘이 제사실에 들어 파범경에 이르지 못한다면, 족장의 자리를 물러나셔야 할 것이오. 이는 이미 원로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니, 더 이상의 유예는 없소." 강태웅의 얼굴에서 핏기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는 결코 눈을 내리지 않았다. 대장로전의 무거운 공기가 그의 목을 조여오는 듯했으나, 그는 이를 악물고 그 시선을 견뎌냈다. "...알겠소." 그가 낮게 대답했다. "사흘이라면, 충분한 시간이오." "족장의 그 자신감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겠소." 대장로가 나직이 덧붙였다. 그 말속에는 이미 결과를 짐작하고 있는 자의 여유가 배어 있었다. 그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강태웅의 뒷모습을 보며, 강경호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승리를 확신한 자의 웃음이었다. 그가 옆에 앉은 원로에게 낮게 무언가를 속삭이자, 그 원로 역시 소리 없이 웃음을 삼켰다. 대장로전을 나서는 강태웅의 등 뒤로, 그 낮은 웃음소리가 오랫동안 따라붙는 듯했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 강태웅의 걸음은 아까와는 또 다른 무게로 느려져 있었다. 정원을 가로지르며 그는 몇 번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으나, 그의 눈에는 그 맑음조차 서글프게 비쳤다. '하늘아.' 그는 속으로 아들의 이름을 되뇌었다. 열일곱이 되도록 파범경에 이르지 못한 아들을 탓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 아이가 짊어져야 할 짐이 자신 때문에 더 무거워졌다는 죄책감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강태웅은 곧바로 박만복을 불러 은밀히 지시를 내렸다. 집무실의 문을 굳게 닫고, 창밖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2품 제약사에게 사람을 보내라. 파범단(破凡丹)을 구할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박만복의 얼굴이 굳어졌다. 오랜 세월 강태웅을 곁에서 모신 그였기에, 그 목소리에 담긴 절박함을 모를 리 없었다. "가주님, 파범단은... 그 값이 어마어마할 뿐만 아니라, 몸에 무리가 큰 약재입니다. 자칫하면..." "안다." 강태웅이 짧게 잘랐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다. 사흘 후, 하늘이가 제사실에서 파범경에 이르지 못한다면, 나는 족장의 자리를 잃는다. 그리고 그 아이는..."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들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조롱과 낙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파범경에 이르지 못한 자가 강씨 가문의 후계자로 남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만복이 너도 잘 알지 않느냐." 강태웅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평생을 '폐물'이라는 낙인을 짊어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도 다른 가문이 아닌, 자신의 친족들에게서 받는 낙인이다." 박만복은 오랫동안 강태웅을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에도 이미 결심이 서 있었다. "...알겠습니다. 즉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다만, 가주님."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파범단을 쓴다 해도, 소가주님의 몸이 그것을 견뎌내실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강태웅이 단호하게 답했다. "지금은 다른 길이 없다." 박만복이 집무실을 나선 뒤에도, 강태웅은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뒷산의 능선을 응시하며, 그는 그저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한편, 강하늘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뒷산에서 수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젯밤 느꼈던 그 낯선 파동을 다시 느껴보려 애썼으나, 아무리 의식을 단전 깊은 곳으로 밀어넣어도 그것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완벽하게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이었다. 그는 몇 번이고 같은 자세로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단전 깊은 곳으로 의식을 밀어넣고, 그곳에서 무언가가 반응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와 같은 정적뿐이었다. 마치 어젯밤의 그 순간이 꿈이었던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져 있었다. '착각이었나.' 그는 씁쓸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훔치며, 그는 계곡물에 손을 담가 얼굴을 씻어냈다. 차가운 물이 손끝을 타고 흐르는 감각만이, 지금 이 순간 그가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어젯밤의 그 감각이 무엇이었든, 지금 당장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흘 후 제사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시험이었다. 그것을 넘지 못하면, 아버지의 자리가 흔들린다는 것을 그는 아직 알지 못했지만, 어렴풋이 오늘 아침 저택 안에 흐르던 긴장된 공기만으로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련을 마친 하인들이 평소보다 서둘러 움직이던 것도, 아버지의 서재에서 흘러나오던 낮은 대화 소리도, 모두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나 강하늘은 그것이 자신과 직결된 일이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가문에 또 무슨 일이 생겼으려니,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다. 계곡을 벗어나 산길을 내려오던 강하늘은, 저택 대문 앞에 서 있는 낯익은 인영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강범이었다. 동갑임에도 이미 파범경에 이른 그는, 언제나처럼 오만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강하늘을 기다리고 있었다. 잘 다려진 청색 무복이 그의 몸에 맞춰 재단된 듯 반듯하게 걸쳐져 있었고, 허리춤에 찬 검 역시 최근 새로 맞춘 듯 반짝이는 광택을 뿜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그를 따르는 몇몇 문도들이 히죽거리며 서 있었다. "오, 폐물 형님. 오늘도 수련은 잘 되셨습니까?" 강범의 목소리에는 조롱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강하늘의 흙 묻은 옷자락과 헝클어진 머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일부러 코를 찡그리는 시늉을 했다. "산에서 흙만 파다 오신 모양이군요. 파범경은 흙 속에 묻혀 있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강하늘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그를 지나치려 했으나, 강범이 앞을 막아섰다. 그의 뒤에 선 문도들이 낮게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도 들으셨겠지요. 사흘 뒤 제사실 시험 말입니다." 강범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실패하시면, 큰아버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군요. 대장로파에서 아주 벼르고 있다는 얘기, 형님도 짐작하시겠지요?" 강하늘의 얼굴이 굳었다. 강범의 말투는 태연했으나, 그 안에 담긴 악의는 명백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별거 아닙니다." 강범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는 한 걸음 더 다가서며, 강하늘의 귓가에 들릴 만큼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저, 이번 기회에 형님과 저 사이의 오랜 결말도 한번 지어보자는 겁니다." "오랜 결말이라니." 강하늘이 낮게 되물었다. "글쎄요." 강범이 어깨를 으쓱했다. "형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열넷에 이미 파범경을 넘었고, 형님은 열일곱이 되도록 문턱도 밟지 못하고 계시지요. 이 가문에서 진짜 후계자가 누구여야 하는지, 이제는 다들 알 만한 나이가 되었지 않겠습니까." 강하늘의 눈이 가늘어졌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강범의 말 속에 숨겨진 뜻이, 단순한 조롱을 넘어선 무언가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어렴풋이 직감했다. 뒤에 선 문도들의 웃음소리가 다시 한번 낮게 퍼졌고, 강범은 그 시선을 즐기는 듯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강하늘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강범의 눈을 마주 볼 뿐이었다. 그 눈빛 속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그는 아직 알 수 없었으나, 무언가 커다란 것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만은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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