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강도현이 서연에게 청혼을 한 지 사흘이 지났다.
답은 아직 나가지 않았지만, 도현은 매일 아침 훈련장 근처에 나타났다. 훈련을 지켜보는 것도 아니고,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조용히 서 있다가 사라지는 정도였다. 그야말로 이상한 방식의 구애였다.
첫날은 그러려니 했다. 둘째 날은 조금 신경이 쓰였다. 셋째 날이 되자 서연은 훈련장 담벼락 너머로 보이는 그 우두커니 선 뒷모습이 신경 쓰여 검을 두 번이나 놓쳤다.
"저 사람 뭡니까." 훈련장을 지나던 기사 하나가 물었다. 신참인지 얼굴이 낯설었다.
"내 혼담 상대인데, 아직 확정은 아니야." 서연이 짧게 답했다.
"저러다 눈으로 사람을 뚫겠는데요."
"..." 서연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도현의 시선은 집요하다기보다는 뭔가를 확인하려는 사람의 눈빛에 가까웠는데, 그게 더 신경을 긁었다.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다시 찾은 사람 같은 눈이었다.
신참 기사가 자리를 뜬 뒤에도 서연은 한동안 검을 다시 들지 못했다. 담벼락 너머의 그림자가 사라진 뒤에야 훈련을 이어갔지만, 마음이 온전히 검에 실리지 않았다.
***
도현의 과거를 알게 된 건 뜻밖의 경로였다. 청하에 파견 나온 늙은 기사 하나가 술자리에서 흘린 말이었다.
그 자리는 원래 정보 교환 차원에서 마련된 술자리였다. 국경 정세를 논하다 보면 자연스레 옛이야기가 튀어나오는 법이고, 늙은 기사는 취기가 오르자 옛 전투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서연은 처음엔 흘려들었다.
"강도현 그 녀석, 이서연 영애께 목숨 빚이 있다는 거 아십니까." 늙은 기사가 술잔을 비우며 불쑥 말했다.
"목숨 빚이요?" 서연이 되물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손에 든 잔을 내려놓는 것도 잊었다.
"5년 전, 북부 국경에서 큰 마수 떼가 밀려왔을 때 말입니다. 그때 신참 기사 하나가 낙마해서 오크 무리 한복판에 떨어졌었죠. 그 신참이 지금의 강도현입니다."
"그런데요." 서연이 다음 말을 재촉했다. 늙은 기사는 술기운 때문인지 이야기를 질질 늘어놓는 버릇이 있었고, 그게 답답했다.
"그때 지원군으로 온 청하 변경백가 사람이 대도 하나로 오크 열댓 마리를 밀어붙였다더군요. 얼굴은 못 봤지만, 청하의 문양은 확실히 봤답니다. 신참 하나 구하겠다고 그 난리를 쳤다고, 그날 살아 돌아온 병사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이야깃거리였습니다."
서연은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기억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5년 전 북부 지원 전투. 그때 서연은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국경 전선에 나갔었다. 얼굴을 가린 채였다. 후계자의 존재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게 청하의 방침이었으니까.
기억을 더듬을수록 파편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진흙탕 위에 나동그라진 신참, 자신을 붙잡던 손, 그리고 그 손을 뿌리치고 검을 휘두르던 자신의 팔. 어렴풋했지만 분명 있었던 장면이었다.
"그때 구한 사람이... 강도현이라는 겁니까." 서연이 확인하듯 물었다.
"그렇다는군요. 지금은 그 신참도 어엿한 기사대장이 됐으니, 세상 참 좁습니다."
늙은 기사는 그 뒤로도 몇 마디를 더 늘어놓았지만 서연의 귀에는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서연은 헛웃음을 흘렸다. 은혜를 갚겠다고 5년 만에 나타나서 청혼이라니, 이건 감사의 방식이 지나치게 극단적이었다. 보통은 선물이나 편지 한 장으로 끝날 일을, 이 남자는 인생을 통째로 걸어버린 셈이었다.
***
다음 날, 서연은 직접 도현을 불러 물었다. 훈련장 뒤편의 작은 정자였다. 바람이 제법 서늘했다.
"그 소문, 사실입니까." 서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에두르지 않았다.
도현의 얼굴이 굳었다. 부정할 생각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그 침묵조차 이미 답이었다.
"사실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갚겠다고 청혼을 하신 거고요." 서연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냉소가 섞여 있었다.
"그것만은 아닙니다." 도현이 정정했다. "은혜를 갚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재물로도, 명예로도. 하지만 저는 그중 청혼을 골랐습니다."
"왜요?" 서연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도현이 서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날 이후로 영애님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5년이나 마음에 담고 살았습니다."
"얼굴도 모르는데 어떻게 마음에 담습니까." 서연이 되물었다.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어갈 참이었다.
"손의 감촉은 기억합니다. 그날 저를 붙잡았던 손. 그리고 그 뒤로 들려온 이야기들. 청하의 후계자가 얼굴을 가리고 전선에 나섰다는 것, 검술이 남달랐다는 것. 조각을 하나씩 맞추다 보니 어느새 영애님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말에는 부채감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무언가가 실려 있었다. 서연은 그것을 뭐라 이름 붙여야 할지 몰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건 은혜가 아니라 집착이잖아.'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골랐다.
"그럼 만약 제가 청혼을 거절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도현이 담담하게 답했다. "다만 제가 영애님을 마음에 담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것참 곤란한 대답이네요." 서연이 미간을 좁혔다. 거절할 여지도 안 주는 대답이었다.
"생각할 시간을 더 주세요." 서연이 결국 그렇게 말을 맺었다.
"얼마든지요."
도현은 그렇게 답하고 돌아섰다. 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쓸쓸해 보였다. 넓은 어깨가 축 처진 것도 아니었는데, 그 걸음걸이 하나만으로도 무언가 무겁게 짓눌린 사람처럼 보였다.
서연은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저 저 사람이 5년 동안 얼굴 모를 자신을 마음에 담고 살았다는 사실이, 자꾸만 가슴 한구석을 건드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서연은 스스로를 다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감정에 쉽게 넘어갈 만큼 순진한 사람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흔들림을 제대로 들여다볼 여유는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한도에서 온 편지 한 통이 서연의 모든 관심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한소영이었다.
봉인을 뜯기도 전에 서연은 이상한 예감에 손끝이 서늘해졌다. 한소영이 굳이 편지를 보낼 일이라면, 결코 가벼운 소식은 아닐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