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검을 쥔 장미의 청혼

4화

서연은 소영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마음에서 지울 수 없었다. '왕실의 발표라니, 그게 마수 대전과 무슨 상관인데.' 처음에는 그런 생각으로 넘기려 했다. 청하는 마수와 싸우는 영지였고, 한도의 정치 소동과는 거리가 멀어야 했다. 애초에 변경백가의 딸이 왕실 파벌 싸움 따위에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왕실이 흔들리면 국경 방어 예산도 흔들린다. 청하 변경백가는 국고 지원 없이는 마수 대전을 감당할 수 없는 영지였다. 서연은 그 사실을 다시 떠올리고서야 이 문제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밤새 잠을 설쳤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창밖을 내다보고, 또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 앉는 짓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옆방에서 자던 시녀가 아침에 눈이 시뻘게진 서연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기까지 했다. "영애님, 어디 아프신 겁니까?" "아니,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서연은 대충 둘러대고 아침 식사도 거른 채 서재로 향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확인해야 한다. 서연은 아버지와 상의한 끝에, 왕실 내무성에 정식으로 문의서를 올렸다. 유가 남작가의 양녀 데뷔가 청하의 국경 지원 예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싶다는, 지극히 공적인 명분을 앞세운 문의였다. 문장을 몇 번이나 고쳐 썼다. 너무 노골적이면 안 됐고, 너무 애매하면 답을 얻지 못할 터였다. 결국 서연은 딱 필요한 만큼만 묻는 문장을 완성했다고 스스로 만족했다. 답은 보름 만에 왔다. 봉투를 뜯는 손이 살짝 떨렸다. 보름이나 기다렸으니 뭔가 그럴듯한 답이 담겨 있으리라 기대했다. "본 사안은 왕실 내부 사항으로, 외부에 공개할 수 없습니다." 딱 한 줄이었다. 그 아래에는 서명도 없이 관인만 찍혀 있었다. 서연은 그 짧은 답변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글자 수를 세어 보기까지 했다. 스물여섯 자. 보름을 기다린 대가로는 지나치게 짧았다. '공식 통로로는 안 되겠구나.' 정공법이 벽에 부딪히는 순간이었다. "이럴 줄 알았어." 소영이 편지를 대신 읽으며 한숨을 쉬었다. "왕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조심스럽게 다루는지 알겠지." "그럼 이제 뭘 어떻게 알아봐야 하는데." "비공식 통로를 써야지." 서연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공식이라는 말에서부터 벌써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소영이 말하는 비공식 통로란, 결국 정보상들을 뜻했다. 서연은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청하에서만 살아온 서연에게 정보상이란 소문으로만 들어본 존재였다. 뒷골목 어딘가에서 은밀히 거래되는, 위험하고도 애매한 사람들. 어릴 적 유모가 해 주던 무서운 이야기 속에나 등장할 법한 존재들. "내가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 "내가 소개해 줄게. 정확히는, 내 시녀가." "시녀?" 서연은 반문했다. 소영의 시녀가 정보상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시녀라면 옷 정리나 머리 손질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나. 소영의 시녀 케이티는 정보 수집 기술이라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특기를 가진 여자였다. 소영은 케이티를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이 아이는 3년 전까지 한도의 정보상 조직에서 일했어. 지금은 내 밑에서 일하지만, 그쪽 인맥은 여전히 살아 있지." "그런 사람을 왜 시녀로 두고 있는 거야?" "내 옆에 있으면 든든하잖아." 소영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리고 걘 바느질도 꽤 잘해." 서연은 그 말을 듣고 케이티라는 여자를 다시 쳐다봤다. 작은 체구에 눈이 유독 커서, 정보상이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인상이었다. 오히려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한 앳된 아가씨처럼 보였다. "진짜 정보상이었다고요?" "의외죠." 케이티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그게 제 최대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저를 의심하지 않거든요." 서연은 그 말에 왠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 순진한 얼굴로 몇 년이나 사람들을 속여 왔다는 뜻이 아닌가. *** 서연은 청하로 돌아가는 대신, 며칠 더 한도에 머물기로 했다. 유하린에 대한 조사를 이대로 미룰 수는 없었다. 아버지에게는 사교계 인맥을 넓히는 김에 조금 더 있다 가겠다고 대충 둘러댔다. 다행히 아버지는 별다른 의심 없이 허락해 주었다. 그날 밤, 서연은 소영의 저택 별채에서 케이티를 다시 만났다. 별채 지하에는 오래전 소영의 할아버지가 만들었다는 작은 은신 공간이 있었다. 소영의 설명에 따르면, 할아버지가 정쟁에 휘말렸을 때 몸을 숨기기 위해 만든 공간이라고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할아버지는 그 방을 쓸 일 없이 천명을 다했고, 대신 손녀가 요긴하게 재활용하고 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방에, 벽면 가득 지도와 서류가 붙어 있었다. 벽 한쪽에는 한도의 지도, 다른 한쪽에는 낯선 인물들의 초상화 스케치가 줄줄이 붙어 있었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뭔가가 잔뜩 적혀 있었다. 촛불 하나만으로 비추기에는 방이 지나치게 컸다. "이게 다 뭡니까." 서연이 벽을 훑으며 물었다. "제가 몇 년간 모아 둔 정보들입니다." 케이티가 태연히 답했다. "버리기엔 아까워서 여기 숨겨 뒀죠." "이걸 소영 님도 알고 있나요?" "물론입니다. 오히려 소영 님이 이 방을 쓰라고 먼저 제안하셨죠." 서연은 그 방을 둘러보며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런 곳이 있다니.' 정공법이 막혔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었다. 이 지하실이야말로 새로운 시작점이 될 수 있었다. 벽에 붙은 서류 하나를 슬쩍 들춰 보니,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귀족가의 뒷사정이 촘촘히 정리되어 있었다. 이 여자,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서연이 케이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유하린에 대해, 어디서부터 알아볼 수 있습니까." 케이티의 표정이 처음으로 흐려졌다. 방금까지의 태연함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경계심이 들어찼다. 그 반응이 서연의 마음에 작은 불안을 심었다. '왜 저런 표정을 짓지.' 단순히 정보가 부족해서 그런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뭔가를 알고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곤란해하는 얼굴에 가까웠다. "영애님." 케이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이름,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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