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검을 쥔 장미의 청혼

3화

한소영은 한도 공작가의 영애였고, 서연의 오랜 친우였다. 둘은 어린 시절 왕실 학당에서 함께 공부한 적이 있었다. 서연이 검을 배우는 틈틈이 사교의 기본을 익히는 동안, 소영은 정치의 흐름을 읽는 눈을 키웠다. 성향이 극단적으로 달랐던 두 사람이 친해진 것도 그래서였다. 서로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소영은 서연이 검술 수업 도중 몰래 빠져나와 낮잠을 자던 걸 처음 발견한 사람이었다. 보통 그런 걸 발견하면 선생에게 고했을 텐데, 소영은 대신 그 옆에 앉아 부채로 서연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이유를 묻자 소영은 이렇게 답했다. "재밌잖아. 다음엔 얼마나 대담해질지 궁금해서." 그야말로 소영다운 대답이었다. 서연은 그때 이 인간과는 오래 얽히겠구나, 하고 어렴풋이 예감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소영의 편지는 짧고 명료했다. "한도로 와. 재밌는 일이 있어." 서연은 그 문장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소영이 '재밌는 일'이라고 부르는 건 대부분 남에게는 곤란한 일이었다. 지난번엔 재밌는 일이라며 불러서 갔더니 몰락한 자작가의 뒷조사를 도와야 했고, 그 전엔 밀수선 명단을 훔쳐 오는 일에 끌려다녔다. 서연은 편지를 접으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또 뭘까.' 그럼에도 서연은 짐을 챙겼다. 소영의 '재밌는 일'이 성가시긴 해도, 대체로 쓸모없지는 않았으니까. *** 한도의 어느 다과회 자리에서, 소영은 찻잔을 든 채 목소리를 낮췄다. 테이블 위에는 값비싼 도자기와 설탕에 절인 과일이 놓여 있었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그쪽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주변 귀부인들의 웃음소리가 배경음처럼 흘렀고, 소영은 그 소음을 방패막이로 삼아 목소리를 더욱 죽였다. "유가 남작가에 양녀가 하나 들어왔대." "그게 재밌는 일이야?" 서연은 찻잔을 든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되물었다. 시큰둥한 말투였다. "이름이 유하린. 열여섯이고, 올해 데뷔탕이야." "양녀가 데뷔탕 하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잖아." "보통은 그렇지." 소영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그 웃음이 심상치 않았다. "그런데 그 아이, 얼굴이 왕비 폐하 젊은 시절 초상화랑 똑같다는 소문이 있어." 서연은 그 말을 듣고서야 소영이 왜 이 얘기를 꺼냈는지 알아차렸다. 찻잔을 든 손이 저도 모르게 멈췄다. "왕실 혈통이라는 거야?" "확인된 건 없어. 확인될 리도 없고." 소영이 목소리를 더 낮췄다.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던 웃음소리가 잠시 커지자, 소영은 그 틈을 타 말을 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유가 남작가의 양녀. 그게 전부야. 하지만 유가 남작이 최근 몇 달 사이에 왕실 재정 지원을 세 번이나 받았다는 건 사실이야." "세 번이나?" "세 번. 그것도 명목이 다 애매해. 영지 보수, 교육비 지원, 그리고 뭐였더라." 소영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아, 사교 활동비. 사교 활동비라니, 그런 걸 국고에서 지원해 준 예가 있었나 싶었어." "그게 무슨 뜻인데?" "내가 알기론." 소영이 손가락을 접으며 하나씩 짚었다. "첫째, 유하린은 왕실이 신경 쓰는 존재라는 것. 둘째, 그 신경 쓰는 방식이 지극히 조심스럽다는 것. 셋째, 조심스러운 이유는 아마 이 아이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인정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는 것." 서연은 미간을 좁혔다. '단순한 양녀가 아니라는 거잖아.' "그래서 그 아이가 나랑 무슨 상관인데." 소영이 눈을 반짝였다. 그건 소영이 아주 흥미로운 패를 꺼내기 직전에 항상 짓는 표정이었고, 서연은 그 표정을 볼 때마다 조금씩 불안해졌다. "6개월 후에 한도에서 큰 무도회가 열려. 유하린의 정식 데뷔 자리로 알려져 있는데, 내 정보통은 이걸 그냥 데뷔로 안 봐." "그럼 뭘로 보는데." "왕실이 뭔가 발표할 자리로 봐." "발표라니, 뭘 발표하는데?" "그거야 나도 모르지." 소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인정을 하든, 부인을 하든, 아니면 아예 다른 자리로 시선을 돌리든. 어느 쪽이든 청하 입장에서는 그냥 넘길 얘기가 아닐 거야." 그 순간 다과회장의 웃음소리가 서연의 귀에는 이상하게 멀게 들렸다. 마치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듣는 소리 같았다. *** 서연은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소영의 말을 계속 곱씹었다. '왕실의 발표라면, 그게 뭐가 됐든 청하와도 무관하지 않을 텐데.' 청하는 변경이었다. 왕실의 결정이 어떻게 나든, 그 파장은 결국 국경까지 밀려오게 마련이었다. 서연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변경의 영주들은 왕실이 재채기만 해도 감기에 걸리는 존재들이었으니까.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유하린이라는 낯선 이름이 서연의 머릿속에서 점점 무거워졌다. 처음엔 그저 흥미로운 소문이었던 것이, 이제는 청하의 미래와 맞닿아 있는 문제로 바뀌어 있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한도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연은 손끝으로 마차 창틀을 두드렸다. 아무 의미 없는 리듬이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머릿속의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을 것 같았다. '열여섯 살 소녀 하나가, 대체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 걸까.' 서연은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유하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를 서연은 만나 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 이름은 이미 서연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문제로, 어쩌면 위협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단순한 양녀 소동이 아니야.' 서연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론이 서연을 어디까지 끌고 갈지, 그때는 아직 알지 못했다. 만약 알았더라면, 서연은 소영의 편지를 받자마자 짐을 싸는 대신 청하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마차는 이미 한도의 대문을 지나 청하로 향하는 길 위에 있었고, 유하린이라는 이름은 이미 서연의 머릿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 버린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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