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설거지 물이 차가웠다.
한겨울도 아닌데 손끝이 얼얼했다.
이 집은 온수를 아끼는 건지, 원래 이렇게 사는 건지 모르겠다.
'백작가라는 게 다 이런 거야?'
그릇을 헹구면서 나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서른일곱 개째.
'이 집 그릇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손님도 안 오는데 매끼 이렇게 많은 접시를 쓴다는 게 이해가 안 갔다.
아마 이 집안 사람들 숫자만큼, 위신도 그만큼 무거운 거겠지.
"언니, 그거 빨리 안 해?"
이서아가 부엌 문틀에 기대어 소리쳤다.
아홉 살짜리가 저렇게 팔짱을 끼고 있는 게 우습다는 걸, 저 애는 모르는 것 같았다.
어디서 배웠는지 턱을 살짝 든 자세까지, 어른 흉내가 제법이었다.
"금방 할게."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속으로는 딴생각을 했다.
'퇴근하고 싶다.'
웃긴 건, 나는 여기서 일하는 게 아니라는 거였다.
서씨 백작가의 적녀.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그랬다.
서류가 뭔 소용인가, 실제로는 부엌에서 그릇을 씻고 있는데.
이름값이란 이렇게 물에 젖어 흘러내리는 거였구나, 싶었다.
한지영 부인이 부엌으로 들어오며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다.
비단으로 짠 손수건이 부엌의 비린내와 어울리지 않게 새하얬다.
"비린내가 진동을 하는구나. 은유야, 너는 손이 그렇게 야무진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니."
칭찬인지 타박인지 구분이 안 가는 말투였다.
"죄송해요, 어머니." 나는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라니, 부를 때마다 목 안쪽이 살짝 아렸다.
열 살 아이의 목소리로 낯선 여자를 어머니라 부르는 일에는,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한지영은 팔짱을 끼고 서서 내가 그릇을 헹구는 걸 지켜보았다.
지켜본다기보다는 감독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럼 좀 도와주지, 그건 안 하고.'
당연히 입 밖으로 낼 말은 아니었다.
그때였다.
손에 쥐고 있던 그릇이 미끄러졌다.
쨍그랑!
물그릇이 바닥에 부딪혀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파편이 반짝이며 부엌 바닥에 흩어졌고, 물웅덩이가 조명을 받아 이상하게 빛났다.
"아이고, 이걸 어째!" 한지영이 뒤로 물러서며 치맛단을 털었다.
'그 정도로 튄 물이 뭐라고.'
발끝에 물 한 방울 안 묻었는데도 저렇게 요란을 떠는 게,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바닥에 흩어진 물웅덩이를 보다가 뭔가가 머릿속에서 확 터졌다.
물웅덩이.
부엌 바닥.
그리고... 다른 부엌.
좁은 원룸의 싱크대 밑에서 걸레를 쥐고 있던 손.
찬물에 불어터진 손가락 마디마디.
"엄마, 나 숙제 봐줘." 작은 목소리.
"조금만 기다려, 은서야." 대답하던 내 목소리.
그 목소리가 지금 이 목을 통해서도 흘러나올 것처럼 선명했다.
와락, 하고 무언가가 밀려들었다.
나는 김미란이었다.
서른네 살, 두 아이를 혼자 키우던 여자.
야근하고 돌아와 라면 하나로 저녁을 때우고, 애들 학원비 걱정에 잠 못 이루던 밤들.
전기세 고지서를 보며 한숨 쉬던 날들, 상사의 눈치를 보며 화장실에서 도시락을 먹던 날들.
전부 다 순서 없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버스가 인도로 넘어오던 그 순간, 아이를 밀치고 대신 서 있던 그 순간까지.
전부 다.
숨 쉴 틈도 없이, 전부 다.
"뭐 하니, 은유야?" 한지영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나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있었다.
숨이 가빴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 같았다.
'나, 어른이었잖아. 애 키우던 어른이었잖아.'
전세 계약서에 도장 찍던 손, 아이 담임과 상담하던 목소리, 그 모든 게 다 진짜였잖아.
그런데 지금은 열 살짜리 몸으로, 남의 그릇을 씻고 있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동시에 눈물도 나올 것 같았다.
이거 뭔가 상태가 이상한데.
'상태창이라도 하나 띄워줬으면 좋겠다.'
쓸데없는 생각이 그 와중에도 끼어들었다.
"죄송해요." 나는 겨우 대답하며 유리 조각을 주웠다.
손끝에 작은 상처가 났다.
피가 배어 나오는 걸 보면서도 이상하게 아프지 않았다.
'몇 번 안 죽어봤나, 이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스쳤다.
버스에 치이던 그 순간의 통증을 이미 알고 있어서인지, 손가락 끝 상처 따위는 시시하게 느껴졌다.
이서아가 킥킥 웃으며 손가락질했다.
"바보 언니, 그릇도 못 씻어."
저 나이 특유의, 남의 실수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냥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김미란의 눈으로 이서아를 보고 있었다.
아홉 살짜리 계집애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애가 애 같은 짓 하는 거지, 뭐.'
의외로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재밌었다.
저만한 딸 하나 키워봤다는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한지영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안쓰럽다는 표정 반, 짜증스럽다는 표정 반이 섞인, 참 애매한 얼굴이었다.
"손 다쳤으면 얼른 치우고 방으로 가. 저녁은 됐다."
밥을 굶기겠다는 소리를, 저렇게 예의 바르게 하는 재주도 참 대단했다.
'김미란이었으면 애 밥은 안 굶겼을 텐데.'
그런 생각이 스치자 헛웃음이 났다.
"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겉으로는 순종적인 딸이었다.
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유리 조각을 마저 주워 담고, 걸레로 바닥을 닦으면서도, 머릿속은 계속 두 개의 삶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다.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서야, 나는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방은 작았다.
백작가의 적녀 방이라기엔 초라할 정도로 작았지만, 김미란이 살던 원룸보다는 그래도 넓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 또 한 번 헛웃음이 났다.
'비교하는 기준이 참 초라하네.'
'이게 무슨 일이지.'
전생의 기억이 조각조각 있었던 건 알고 있었다.
어렴풋한 꿈처럼, 가끔 스치는 장면들.
가끔 낯선 노래가 입에서 흘러나오거나, 처음 보는 음식의 맛을 이미 아는 것 같은, 그런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엔 완전히 다르다.
마치 두 개의 삶이 한 번에 켜진 스위치처럼, 동시에 켜져버렸다.
이서아의 얼굴을 보다가도 은서의 얼굴이 겹쳐 보였고, 한지영의 목소리를 듣다가도 예전 상사의 잔소리가 겹쳐 들렸다.
손끝의 상처를 문지르며 나는 중얼거렸다.
"내가... 두 번 살고 있는 건가."
말해놓고 나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누가 들었으면 열 살짜리가 헛소리한다고 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에게는 그 어떤 말보다 정확한 표현이었다.
창밖으로 달이 밝았다.
방 안이 은은하게 밝아져서, 이불 속에서도 손등의 상처가 얼핏 보였다.
내일이 마력 속성 감정 의식이라는 게 문득 떠올랐다.
열 살이 되면 치른다는 그 의식.
이 나라의 모든 귀족 아이들이 겪는다는 그 통과의례.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하녀가 내일 입을 옷을 미리 걸어두고 갔었다.
새하얀 의식용 드레스였는데, 그때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예쁘다고만 생각했다.
'하필 이런 날에 이런 걸 기억해내다니.'
나는 이불 속에서 조용히 웃었다.
타이밍 하나는 참 지독하게 나빴다.
전생의 기억이 통째로 밀려든 그날 밤에, 하필이면 내일 인생이 결정될 의식을 앞두고 있다니.
'김미란으로 죽었는데, 서은유로 태어나서, 이제는 뭐가 될지도 모르는 속성 감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웃음이 났다.
이서아는 저녁을 먹으며 뭐라고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지영의 나긋한 목소리도 간간이 섞여 들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배가 고팠다.
어른의 몸이었을 때는 참아냈을 배고픔이, 지금 이 작은 몸에서는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몸은 애인데 정신은 어른이라니, 이거 참 불편한 조합이네.'
잠이 오지 않았다.
두 개의 기억이 서로 자리를 잡으려 밀고 당기는 느낌이었다.
은서와 이서아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고, 야근하던 회사 건물과 이 낯선 저택의 복도가 겹쳐 보였다.
그러다 문득, 내일 있을 감정 의식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속성이 뭐가 나오든, 일단 살아야겠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드는 걸 보면, 확실히 나는 두 번 살아본 사람이 맞았다.
달빛이 창문 틀을 타고 방바닥까지 길게 늘어졌다.
그 빛을 바라보며 나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다짐했다.
이 몸으로, 이 이름으로, 어떻게든 다시 살아보기로.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눈을 감기 직전, 낮에 들었던 하녀들의 수다가 떠올랐다.
"이번 감정 의식에서 이상한 속성이 나오면 큰일이라던데."
"그러게, 작년에 어느 집 도련님은 최악의 속성이 나와서 아예 집안에서 쫓겨났다잖아."
그 말을 들을 때는 그냥 남 일이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설마 나한테 그런 일이 생기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지만, 어딘가 불안한 예감이 가슴 한구석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 예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알게 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