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관자놀이 쪽에서 뭔가 둔기로 두드리는 듯한 통증이 규칙적으로 반복됐다.
[상태: 마력 과다 소모, 회복 중]이라는 문구가 눈앞에 흐릿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건 무슨 회복 아이템도 없이 알아서 나으라는 소리네.'
'포션 하나 안 챙겨주고. 참 매정한 시스템이야.'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픽 쓰러졌다.
손끝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이 들었다.
'그때 그 방 안 글자들, 진짜 다 내가 쓴 거였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뜨자 벽 전체가 글자로 뒤덮여 있었고, 문서관이라는 사람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던 것만 어렴풋이 떠올랐다.
'뭐, 어차피 결과는 다 비슷하게 나올 거였겠지.'
문밖에서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기울여보니, 하녀들의 대화였다.
"들었어? 그 방 전체에 글자가 가득 찼었대."
"세상에, 그런 마법을 봤어? 신관님도 처음 본다고 하셨대."
"백작님 얼굴이 그렇게 새파랗게 질린 건 처음 봤다니까."
"근데 그게... 좋은 마법이 아니라던데?"
"결함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심상치 않다고들 하더라."
소문이 벌써 이렇게 퍼졌구나.
집 안에서 이 정도인데, 밖으로 새어 나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입 무거운 사람 하나만 있어도 이렇게 안 될 텐데.'
'아니, 애초에 그 방에 그렇게 사람이 많았으니 이건 뭐 못 막지.'
실제로 사흘이 지나자, 사교계에 완전히 소문이 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서씨 백작가 영애가 결함 마력을 가졌다더라."
"게다가 혈통 의혹까지 있다는데?"
"그 집 마차가 요즘 어느 저택에도 초청받지 못한다더라."
"불쌍한 백작님. 딸 하나 잘못 둬서 저 고생을 하시네."
세상 참 빠르다.
이 정도면 방송국보다 빠른 거 아닌가.
'옛날 같으면 이 정도 화젯거리로 예능 프로 하나는 나왔겠다.'
한지영이 이 소식을 듣고 얼마나 히스테리를 부렸는지, 저택 하녀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밥상을 나르던 하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본 적도 있었다.
물건 깨지는 소리가 밤마다 저 안쪽 방에서 들려왔다.
'저러다가 저 집 접시 다 깨지면 새로 사야 할 텐데. 걱정도 참 팔자다.'
이서아는 아예 마주치지도 않았다.
복도에서 스치기라도 하면 나를 없는 사람처럼 지나쳤다.
'뭐, 없는 사람 취급이야 익숙하지.'
'이 집에서 내 존재감이란 게 원래 그 정도였으니까.'
서지호가 나를 다시 부른 건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이번에는 응접실이 아니라 서재였다.
낯선 사람은 없었다.
대신 그의 얼굴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굳어 있는 결심이 있었다.
서재 안은 조용했다.
벽마다 빽빽하게 꽂힌 책들 사이로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책상 위에는 서류 뭉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저것들 다 나에 대한 조사 결과인가.'
'열 살짜리 하나 조사하는데 저렇게 많은 서류가 필요해?'
"조사는 끝났다." 그가 말했다.
"명확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지만, 더 이상 이 문제를 끌 수 없다."
'끝나지 않았는데 끝났다고 하네.'
'결론 안 나온 걸 끝났다고 우기는 거, 어디서 많이 본 방식인데.'
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책상 위 서류를 슬쩍 훔쳐봤다.
내 이름이 적힌 부분이 붉은 줄로 그어져 있었다.
'저건 뭐, 탈락 표시인가.'
"너는 오늘부로 이 저택을 떠난다." 서지호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북쪽 숲 경계 근처의 사냥막으로 보내겠다. 거기서 지내도록 해라."
숲.
사냥막.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버려지는 것이었다.
'그래, 예상은 했다.'
'그래도 진짜로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네.'
"거기엔... 아무도 없잖아요." 나는 겨우 말했다.
"마물도 나오는 곳이라고 들었어요."
서지호는 눈길을 피했다.
시선이 창밖으로, 그다음엔 책상 위 서류로, 다시 벽으로 옮겨 다녔다.
한 번도 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필요한 물건은 챙겨줄 것이다."
그게 그의 대답이었다.
딸의 목숨을 위험한 숲에 던져놓으면서, 필요한 물건 몇 개로 죄책감을 씻어내려는 태도.
'참, 편리한 양심이네.'
'그 양심 팔아서 뭐 산 거야, 방음벽?'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여기서 더 매달려봐야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열 살짜리답게 좀 더 울고 매달려야 하나.'
'아니, 그런다고 저 표정이 바뀔 리가 없지.'
서지호는 이미 서류를 정리하며 다음 일을 준비하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짐이라고 해봐야 이불 한 채, 옷 몇 벌, 마른 식량 조금이 다였다.
하녀 하나가 미안한 얼굴로 짐을 마차에 실었다.
"아가씨... 죄송해요."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딱히 당신 탓은 아니지.'
'이 집안 전체가 원래 이런 식이었으니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한지영과 이서아는 배웅조차 나오지 않았다.
문 하나 열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지.'
'이 정도 무관심이면 오히려 마음이 편하네.'
서지호만 저택 앞에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마차 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마차에 오르기 전, 나는 그를 한 번 돌아보았다.
"아버지." 나는 마지막으로 불러보았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표정도 없었다.
마치 이미 오래전에 지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는 사람처럼.
'그래, 뭐 대답을 바란 것도 아니었어.'
'그냥 한 번쯤 불러보고 싶었을 뿐이지.'
마차 문이 닫혔다.
바퀴가 자갈길 위를 구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마차는 두 시간 정도 달렸다.
창밖 풍경이 서서히 바뀌는 걸 지켜봤다.
저택가의 화려한 정원이 사라지고, 밭이 나타나고, 그다음엔 듬성듬성한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멀리까지 보내는 걸 보면, 진짜 다시 안 볼 생각인가 보네.'
숲의 경계에 다다르자, 마부는 마차를 세우고 나를 내려주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셔야 합니다." 마부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사냥막은... 저 안쪽으로 한참 더 들어가야 합니다."
"길은... 있나요?" 내가 물었다.
"희미하게 나 있긴 합니다만." 마부가 손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계속 가시면 됩니다. 밤이 되기 전에 도착하시길 바랍니다."
'밤이 되기 전에 도착 못 하면 어떻게 되는데.'
'아니, 물어보나 안 물어보나 답은 뻔하지.'
짐을 받아 든 나는, 마차가 돌아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람 소리만 남았다.
숲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무들 사이로 스며드는 저녁 빛이 오히려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노을이 나뭇가지 사이로 붉게 걸려 있는데도, 그 빛이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핏빛처럼 보였다.
'열 살짜리 애를 이런 데다 버려도 되는 거야.'
한숨이 나왔다.
'뭐, 회귀 전에도 이런 취급 받아본 적 많으니까.'
'익숙해지면 그만이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슬퍼할 여유가 없었다.
슬퍼하다 마물한테 잡아먹히면 그게 더 슬픈 결말 아닌가.
짐을 등에 지고 숲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밑에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풀숲 사이로 뭔가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다시 보면 그냥 바람이었다.
'이런 데서 겁먹으면 답이 없는데.'
'그래도 겁이 안 나는 건 아니지, 사람이니까.'
어디선가, 낮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짧고, 멀리서, 하지만 분명하게.
나는 걸음을 멈췄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저건... 짐승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소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금 뒤, 다시 한번 울려왔다.
이번엔 더 가까운 곳에서.
'가까워지고 있어.'
숲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짐을 고쳐 메고, 소리가 들려온 반대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제발 이번 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게 해주라.'
나뭇가지들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리고, 저 앞쪽 어둠 속에서, 뭔가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