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학대당했더니 마력에 눈떴다

3화

며칠 동안 저택 분위기는 이상하게 조용했다. 조용하다는 게, 오히려 더 무서운 신호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전생에도 그랬다. 회사 상사가 갑자기 존댓말을 쓰기 시작하면, 그건 곧 잘리는 신호였다. 지금 이 저택도 마찬가지였다. 평소라면 한지영이 트집을 잡고, 이서아가 한 마디씩 얹고, 서지호는 그걸 못 본 척했을 텐데. 그 모든 게 뚝, 끊겼다. 밥상에 반찬이 하나 줄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이서아가 코웃음도 안 쳤다. 그게 더 소름 끼쳤다. '차라리 시비를 걸어라. 이렇게 조용하니까 무슨 함정 카드 준비하는 것 같잖아.' 그렇게 닷새를 보냈다.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새벽마다 눈이 떠져서 천장만 바라봤다. '뭔가 오고 있다.' 그 감각만큼은, 김미란으로 살았던 삼십 년 인생에서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닷새째 되던 날, 서지호가 나를 응접실로 불렀다. 응접실 문을 열자마자, 낯선 공기가 확 끼쳤다. 방 안 온도가 다른 곳보다 몇 도는 낮게 느껴졌다. 착각이겠지만, 그런 착각이 들 정도로 분위기가 무거웠다. 낯선 사람이 하나 앉아 있었다.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딱딱한 재질의 옷. 신전 소속 문서관이라고 했다. 문서관이라는 직책이 이 세계에서 뭘 하는 사람인지는 몰랐지만, 딱 봐도 '공식 기록용 증인' 느낌이었다. '저런 사람이 왔다는 건, 이게 그냥 가정사가 아니라는 뜻이겠지.' "앉아라." 서지호가 말했다. 존댓말도 아니고, 딸에게 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마치 남에게 하듯 딱딱했다. '아버지, 그 톤은 좀 너무한데요.' 속으로 딴지를 걸면서도, 나는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한지영과 이서아도 뒤쪽에 서 있었다. 한지영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 표정, 뭔가 재밌는 구경거리를 기다리는 얼굴인데.' 저 여자는 이럴 때만 표정 관리를 못 한다. 평소엔 그렇게 우아한 척을 하면서. 이서아는 아예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빛에 승리감이 그대로 묻어났다. '벌써 이긴 것처럼 보는 건 너무 이른 거 아니냐.' 근데 사실, 이 상황에서 이긴 쪽이 누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서지호가 서류를 탁, 하고 탁자에 올려놓았다. 종이 넘기는 소리마저 딱딱하게 들렸다. "오늘부로 서은유의 혈통에 대해 공식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겠다." 방 안이 순간 얼어붙었다. 문서관이 조용히 펜을 들고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이 아이의 마력 속성이 오대 속성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상적인 가문 혈통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결과다." 서지호가 말을 이었다. "이는 곧, 이 아이가 내 친자식이 아닐 가능성을 시사한다." 나는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마력 속성이 이상하다고 친자식이 아니라니. 논리가 그렇게 되는 건가.' 전생으로 치면 혈액형이 특이하다고 친자 확인 소송 거는 격 아닌가. 근데 이 세계에서는 그게 진짜 논리로 통했다. 마력이라는 게 혈통과 직결되는 이 세계관에서는, 어쩌면 저게 정말 '과학적 근거'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억울한 건 안 억울해지는 거 아니잖아.' 죽은 어머니, 후작가 출신의 그 여자를 향한 그의 콤플렉스가 여기서 이런 식으로 터지는구나.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지금, 오랫동안 벼려온 명분을 드디어 꺼내 든 표정이었다.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마치 오래 참았던 숙제를 드디어 제출하는 학생처럼. '당신, 이거 얼마나 준비한 거예요.' 이 정도 규모의 일이면 하루아침에 준비될 리가 없었다. 문서관을 부르는 절차, 조사 신청, 그 사이 오갔을 서류들. 이건 최소 몇 주 전부터 짜여 있던 그림이었다. '닷새 동안 조용했던 게, 이거 준비하느라 그랬던 거였구나.' 소름이 확 끼쳤다. "문서관님이 정식으로 조사를 진행하실 것이다." 그가 문서관을 가리켰다. 문서관이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 혈통 검증 절차에 따라, 신전 측에서 공식 확인을 진행하겠습니다." 목소리가 어찌나 딱딱한지, 미리 녹음해서 재생하는 줄 알았다. 한지영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는 척했다. "아이고, 정말이지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저도 몰랐답니다." 연기가 참 훌륭했다. 박수는 안 칠 거지만. '저 손수건, 눈물 한 방울도 안 묻었는데 계속 훔치는 척하시네요.' 이서아가 한 술 더 떴다. "언니가... 정말 우리 언니가 아닐 수도 있는 거예요?" 목소리에 걱정이 담긴 것처럼 들렸지만, 입꼬리는 이미 올라가 있었다. '너 지금 그 표정으로 그 대사 하면 설득력 제로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아버지."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저는... 아버지의 딸이 맞아요." 서지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건 조사가 밝혀줄 것이다." 목소리에 감정이라는 게 아예 없었다. 마치 서류 하나를 처리하는 듯한 어조. 그 순간, 나는 뭔가 깨달았다. 이 사람에게 나는, 진짜 딱 그거였다. 처리해야 할 서류. 순간, 가슴 속에서 뭔가가 뜨겁게 치솟았다. 분노. 억울함. 그리고... 오래된 상처들. 그릇을 씻던 손, 밥을 굶었던 밤들, 이서아의 손가락질, 한지영의 위선적인 미소. 전생의 기억, 김미란으로 살았던 시간까지, 전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야근하다가 상사한테 이유 없이 혼났던 밤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과물을 인정받지 못했던 순간들. 그리고 이번 생에서도, 결국 똑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증명해야 하는 자리. '왜 나만 계속 증명해야 하는 건데.' 나는 손을 꽉 쥐었다. 손끝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귀에 들릴 정도로 크게. "진짜예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저는 진짜 아버지 딸이에요." 그 순간, 방 안의 벽면에 무언가가 번쩍였다. 글자였다. 허공이 아니라, 벽에. 바닥에. 천장에까지. [진(眞)] [진실(眞實)] 글자들이 방 전체를 뒤덮으며 빛을 뿜었다. 쿠구구궁-! 건물이 낮게 진동했다. 샹들리에가 흔들리고, 창문이 덜컹거렸다. 찻잔이 탁자 위에서 달칵거리며 흔들렸다. 벽에 걸린 그림 액자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누군가 벽을 세게 밀고 있는 것 같은 진동이었다. "뭐, 뭐야!" 문서관이 의자를 넘어뜨리며 뒤로 물러났다. 한지영이 이서아를 끌어안으며 비명을 질렀다. "이, 이게 뭐예요! 무슨 일이야!" 평소의 우아한 말투는 온데간데없이 날아갔다. '그러니까 진짜 감정 나올 때는 저런 말투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관찰이 되는 나 자신이 좀 웃겼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손끝에서 힘이 계속 빠져나가고 있었다. 몸속에서 뭔가가 밖으로 콸콸 쏟아져 나가는 느낌. 이러다 정말 쓰러질 것 같았다. [경고: 제어 불가능한 발현 상태입니다.] '경고를 이제 알려주면 뭐 하냐고.' 나는 속으로 소리 없이 외쳤다. 이미 벽이 다 빛나고 건물이 흔들린 다음에 경고창 띄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소방차가 다 타고 난 집에 도착하는 격 아닌가.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글자들이 눈앞에서 이중, 삼중으로 겹쳐 보였다. '이거 뭔가 굉장히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은데.' 서지호는 벽면 가득한 글자를 보며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분노도 아니고, 두려움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계산이 무너진 사람의 얼굴이었다. 마치 완벽하게 짜놓은 시나리오에 갑자기 예상치 못한 특수효과가 터진 것처럼. '이걸로 오히려 더 불리해졌을지도.'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정신도 없었다. 저 [진실]이라는 글자가 대체 뭘 증명하겠다는 건지, 나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진짜라고 외친 순간 나온 반응이니, 내 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로 뭔가 다른 걸 폭로하는 신호일 수도 있었다. 문서관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뭔가를 받아 적고 있었다. "이, 이건... 전례가 없는 현상입니다..."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 저 사람 표정을 보니, 이건 정말로 흔한 일이 아니었다.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귓가가 멍했고, 시야가 흔들렸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는데, 그게 누구 목소린지도 구분이 안 됐다.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마치 온몸의 뼈가 다 녹아내리는 것 같은 느낌. '이대로 진짜 죽는 건 아니겠지.' 그런 어이없는 생각까지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문서관이 겁에 질린 채 뒷걸음질 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서지호가 나를 향해 낮게 뭐라고 중얼거리는 입 모양이었다. 입술은 이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더 확실한 증거가 되겠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곱씹어 볼 새도 없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가, 이내 완전한 어둠으로 뒤덮였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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