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정년퇴직식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삼십칠 년을 근속했다는 표창장을 옆구리에 끼고, 후배 교사들이 건넨 꽃다발을 품에 안고, 나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딱 세 칸을 남겨두고 발을 헛디뎠다.
서른일곱 해를 근속한 수학교사가 은퇴하는 날 계단에서 넘어져 죽는다는 건,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머리가 먼저 닿았는지 등이 먼저 닿았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시야가 새하얗게 타오르더니 뚝 끊겼다는 것만 기억이 났다.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그런데 왜 다시 눈이 떠지는가.
눈을 뜨자 천장이 보였는데, 우리 집 천장이 아니었다. 금박을 두른 몰딩이 사방으로 흐르고, 캐노피 침대의 커튼이 하늘하늘 흔들리는 그런 천장이었다. 좁은 아파트 안방 천장에 곰팡이 자국 하나 없이 사는 게 소원이었던 나로서는 이게 무슨 호강인가 싶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호강 타령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얗고 가늘고 손톱이 매끈한, 열몇 살짜리 소녀의 손이었다. 내 손이 아니었다. 손등에 굵은 주름 하나 없고, 손가락 마디마디에 관절염으로 시달린 흔적도 없었다. 아니, 지금은 내 손이라는 건가? 손가락을 접었다 펴보니 그대로 움직였다. 내 의지대로.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조용해서 무서웠다. 이런 게 죽음 이후의 혼란이라는 건가, 나는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삼십칠 년간 수학을 가르치며 얻은 게 있다면 패닉 상태에서도 변수부터 정리하는 습관이었다. 변수 하나, 나는 죽었다. 변수 둘, 나는 지금 살아 있다. 변수 셋, 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변수 넷, 이 방은 내가 알던 어떤 시대, 어떤 나라의 것도 아니다. 결론, 뭔가 대단히 잘못됐거나 대단히 특별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방정식이 안 풀린다고 문제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학생들에게 늘상 하던 말인데, 정작 내 인생에 이렇게 적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일어나 침대 옆 협탁에 놓인 거울을 집어 들었다. 손잡이에 보석이 박힌, 딱 봐도 값나가는 물건이었다. 거울 속에는 은발에 가까운 금발과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인형처럼 곱상한 소녀가 있었다. 열여섯 살쯤 됐을까 싶은 얼굴이었는데, 콧대며 입술선이며 어느 한 군데 흠잡을 데가 없어서 잠깐은 그냥 넋을 놓고 바라봤다. 그러다 그 얼굴이 내가 지은 표정을 그대로 따라 짓는 걸 보고서야 실감이 났다. 눈썹을 찡그려보니 거울 속 소녀도 똑같이 찡그렸다. 이게 나라는 거지. 육십둘 먹은 영혼이 열여섯짜리 미소녀의 몸에 들어앉았다는 거지.
아름답다는 감상이 먼저 스친 건 부정하지 않겠다. 평생 거울을 봐도 이런 얼굴 한 번 가져본 적 없는 아저씨 입장에서는 감격스러울 법도 했다. 다만 그 감상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뭔가 이상했다. 이 방의 분위기가, 이 몸의 손끝이 떨리지 않는 방식이, 정상적인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뛰어들어왔다. 앳된 하녀복을 입은 처자였는데, 나를 보자마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그대로 문 앞에 붙박여 섰다. 숨소리마저 죽인 채로. "아, 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 목소리가 떨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손에 든 물주전자가 달그락 소리를 내는 걸 보니 손까지 떨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방금 일어났다." 존대를 써야 할지 하대를 써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단 얼버무렸는데, 상대는 그마저도 무서운 듯 뒷걸음질을 쳤다. 두 걸음, 세 걸음. 벽에 등이 닿을 때까지.
이거 뭔가 심하게 이상하다. 하녀가 주인을 무서워하는 거야 계급사회니까 이해가 간다지만, 저건 존경이 아니라 순수한 공포였다. 짐승 앞에서 몸을 낮추는 초식동물의 눈빛이었다는 거다. 사슴이 호랑이 앞에서 짓는 그 표정. 대체 이 몸의 주인은, 나 되기 전의 그 애는 무슨 짓을 하고 다녔던 걸까. 삼십칠 년간 별의별 문제아를 다 봐왔다고 자부했는데, 이건 그 어떤 학생에게서도 본 적 없는 반응이었다.
"아가씨, 아침 준비를... 다녀오겠습니다." 하녀는 말을 다 마치지도 않고 문을 닫고 뛰쳐나갔다. 발소리가 복도를 타고 멀어지는데 그 속도가 심상치 않아서, 마치 불난 집에서 도망치는 사람 같았다. 나는 잠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정년퇴직 당일 계단에서 죽은 노인이 어느 세계인지도 모를 곳의 귀족 소녀로 다시 태어났고, 그 소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는 것. 여기까지가 지금 내가 파악한 전부였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은 아니었다. 다만 받아들이기가 그저 힘들었을 뿐.
방을 둘러봤다. 화려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사치품들이 방 안 곳곳에 널려 있었다. 벽에는 큼지막한 유화가 걸려 있었고, 창가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화병이 놓여 있었으며, 옷장 문틈으로는 색색의 드레스가 삐져나와 있었다. 평생 검소하게 산 값이 이런 데서 보상받는다면 그것도 나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곧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밟히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벽 한쪽에 걸린 채찍이었다. 장식용이라고 하기엔 손잡이가 닳아 있었고, 가죽끈 끝에는 뭔가 말라붙은 얼룩까지 보였다. 그 아래 서랍장 위에는 무언가를 적어놓은 쪽지 뭉치가 흩어져 있었다. 다가가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옆에 붉은 줄이 죽죽 그어진 걸 보니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았다. 어떤 이름 옆에는 별표가 세 개나 그려져 있었다. 그게 칭찬의 의미가 아니라는 건,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씨발. 나는 속으로 짧게 욕을 뱉었다. 육십 평생 학생들 상담해온 감으로 봐도, 이건 그냥 나쁜 애가 아니라 아주 제대로 망가진 애의 방이었다. 채찍에, 인명 리스트에, 붉은 줄까지. 이걸 다 보고도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이상한 거다. 그리고 그 몸을 지금 내가 쓰고 있다는 거다. 서른일곱 해 동안 학생 인권이며 상담이며 그렇게 떠들던 내가, 하필 이런 애의 몸에 들어와서 이런 물건들을 마주하고 있다니. 이런 걸 두고 인생의 아이러니라고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재수가 없는 걸까.
쪽지를 슬쩍 내려놓고 손을 뗐다. 만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뭔가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방의 주인은 이걸 매일 들여다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 다시 문이 열렸다. 이번엔 노크도 없었다. 나보다 나이가 좀 더 있어 보이는 청년이 성큼성큼 들어왔는데, 은발과 보라색 눈이 나와 똑같아서 대충 짐작이 갔다. 오빠쯤 되나 보다. 걸음걸이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딱딱하고, 화가 나 있고, 눌러 참고 있는 게 그대로 보이는 그런 걸음이었다. 청년은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눈을 가늘게 좁혔다.
"오늘은 또 무슨 수작을 꾸미는 거지?"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나는 순간 말이 턱 막혔는데, 이 반응이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오해라면 저렇게까지 확신에 찬 눈빛일 수가 없다. 저건 오랜 경험에서 나온 눈빛이었다. 얼마나 많이 당해봤으면 저런 표정이 나올까.
청년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어제 그렇게 소란을 피워놓고, 오늘 아침엔 또 뭘 벌이려는 건지 궁금하군."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는 그 눈빛에는 경멸과 경계가 반쯤씩 섞여 있었다. 가족을 저런 눈으로 본다는 게 가능한가 싶었는데, 지금 보니 충분히 가능했다.
나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눈을 크게 뜨고 상대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첫 대면부터 적개심을 받아내고 있다는 게 실감 났다. 뭐라도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변명할 잘못이 뭔지도 몰랐다. 이런 게 첩첩산중이라는 건가.
아무래도 이 서은하라는 애의 인생,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게 망가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폐허 위에 이제 내가 서 있다는 거다. 오빠라는 저 청년의 눈빛을 보아하니, 이 몸으로 살아가는 첫날부터 순탄할 리는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