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서재로 향하는 복도가 그렇게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집사의 뒤를 따라 걸으며 나는 머릿속으로 계속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왕궁에서 급보가 왔다는 건 파혼 얘기가 벌써 나왔다는 뜻일까, 아니면 다른 문제일까. 삼십칠 년간 학부모 상담을 해온 감으로 보면, 이런 급작스러운 소환은 대개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서재 문을 열고 들어서자,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서건우, 아버지라는 사람이었다. 나이가 서른일곱이라고 들었는데 그 나이에 이런 무게감을 지닌 얼굴이라니, 이 세계의 삼십대는 우리 세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늙는 모양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 잠시 눈을 좁혔다가 이내 손짓으로 앞자리를 가리켰다.
"앉아라." 짧은 명령이었다.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자리에 앉으며 상황을 살폈다. 서건우의 책상 위에는 봉인이 뜯긴 서신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찍힌 인장이 왕가의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붉은 밀랍 자국이었다.
"왕궁에서 서신이 왔다." 서건우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준혁 왕태자 전하께서, 너와의 혼약을 재검토하시겠다는 뜻을 폐하께 전달하셨다." 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나는 속으로 아, 결국 이거였구나 싶으면서도 겉으로는 애써 평온을 유지했다.
"재검토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 아버지."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건우가 나를 잠시 응시했다. 그 눈빛에는 딸에 대한 걱정과 가문에 대한 걱정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 비율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파혼을 정식으로 청하시기 전 단계다. 폐하께서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으셨지만, 왕태자궁에서 계속 압박을 넣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서건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네가 그동안 벌인 일들이 결국 이 지경까지 만든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사과를 해야 할까, 변명을 해야 할까, 아니면 대책을 제시해야 할까. 육십 평생 살아온 경험으로 보면 사과만으로는 이 국면을 넘길 수 없다는 게 명확했다. 상대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실질적인 변화의 증거였다.
"아버지, 제가 그동안 잘못했다는 건 인정해요." 나는 최대한 진솔하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달라지고 싶어요. 제가 정말로 달라진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게, 시간을 주세요." 이건 진심이었다. 겉으로 예의를 차리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계산을 하는 이중 구조가 아니라, 정말로 이 상황을 어떻게든 풀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서건우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달라진 모습이라니, 어떻게?" 그 물음에 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지금 당장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아야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이수정에게 정식으로 사과하고, 앞으로 하인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아카데미에 개학하면... 제가 예전에 상처 입힌 사람들에게도 사과할 기회를 찾아보겠어요." 나는 말을 하면서도 이게 얼마나 무모한 계획인지 스스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서건우가 한동안 나를 응시했다. 그 침묵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심장이 쪼그라드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게 무섭다는 감정인가 보다, 라고 또 한번 스스로 진단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믿기 어렵다." 짧고 단호한 말이었다. "네가 지금까지 보여준 것과 지금 하는 말이 너무 다르다. 갑자기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게 사람이더냐." 그의 목소리에는 실망과 의심이 섞여 있었는데, 그게 딸을 향한 것인지 상황 전체를 향한 것인지 구분이 안 됐다.
"진심이에요, 아버지."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조급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이대로 담판이 실패하면 이 가문의 위기는 그대로 진행될 것이고, 나는 그 결과를 그대로 감당해야 할 처지였다.
서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의 등이 창밖 풍경을 가리며 서재 안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 "진심이라는 말은, 서은하, 네가 이제까지 수백 번은 했던 말이다." 그가 뒤돌아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매번 사과하고, 매번 달라지겠다고 하고, 매번 며칠 못 가서 원래대로 돌아갔지."
아, 이게 전 인격이 저지른 패턴이었구나.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사과와 재발이 반복되면서 신뢰가 완전히 바닥났다는 거였다. 이건 단순히 몸이 바뀌었다는 사실 하나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신뢰라는 건 말이 아니라 시간과 행동으로만 쌓이는 것이었다.
"이번엔 다를 거예요."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 말에 서건우가 마침내 몸을 돌려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의심이 가득했지만, 그 안에 작은 틈 같은 게 보였다. 완전히 닫힌 문이 아니라 살짝 열려 있는 문 같은 느낌이었다.
"두고 보겠다." 그가 짧게 말했다. "하지만 명심해라. 이번에 또 문제를 일으키면, 나도 더는 너를 감쌀 수 없다. 왕가에서도 이번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할 거다." 확실한 증거라는 말이 걸렸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물어보려는데, 서건우가 먼저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 개학이 앞당겨졌다. 이번 주 안에 등교해야 한다." 그 말에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조용히 지내며 신뢰를 서서히 회복하려던 계획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번 주요? 원래 다음 달이라고..."
"왕가에서 요청했다. 네가 얼마나 변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뜻이겠지." 서건우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이준혁 전하께서도 같은 학년으로 등교하실 것이다.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서재를 나오며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꼈다. 왕태자가 직접 나를 지켜보겠다는 뜻이었고, 그건 곧 실패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담판은 절반의 성공이었지만, 그 절반의 성공이 오히려 더 큰 압박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복도 끝에서 이수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이번 주 안에 아카데미에 등교해야 하고, 거기서 왕태자와, 그리고 내가 과거에 망쳐놓은 수많은 관계들과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짙은 먹구름처럼 나를 덮쳐오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육십 평생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내가 그 문제의 당사자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문제의 규모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훨씬 위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