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음 날 아침, 나는 최대한 조용히 지내며 신뢰를 쌓아가겠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서건우와의 담판에서 얻어낸 시간이 원래 계획보다 훨씬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남은 며칠 동안 최소한 이수정과의 관계는 확실하게 회복해두고 싶었다. 그게 이 저택 안에서 가장 확실하게 검증받을 수 있는 지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아침 식사 후 나는 이수정을 정원으로 불렀다. 이건 좀 위험한 시도였는데, 주인이 하녀를 따로 부르는 게 이 저택 안에서 어떤 의미로 읽힐지 몰라서였다. 하지만 나는 진심을 전하려면 형식적인 사과보다는 진지한 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교직 생활 삼십칠 년 동안 배운 것 중 하나가, 진짜 사과는 상대의 눈을 보고 하는 거라는 사실이었다.
"이수정,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나는 정원 벤치에 앉으며 말을 꺼냈다. 이수정은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으로 내 앞에 섰다. "제가 그동안 당신에게 한 일들, 어제 다시 생각해봤어요. 정말 미안했어요. 진심으로요."
이수정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이 없었다. 그녀의 손이 앞치마 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는 게 보였다. "아가씨께서... 그런 말씀을 하셔도, 저는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매번 그러셨습니다. 사과하시고, 다음 날이면 원래대로..."
"이번엔 다를 거예요."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이 얼마나 공허하게 들릴지 알고 있었다. 서건우도 어제 똑같은 이유로 나를 믿지 않았으니까. 말로만 다르다고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좀 더 구체적인 걸 제안하기로 했다.
"이수정, 제가 앞으로 한 달 동안 당신에게 화 한 번 안 내면, 그때 다시 믿어줄 수 있어요?" 이건 즉흥적으로 나온 제안이었지만, 스스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인 기한과 조건을 제시하는 게 말뿐인 사과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으니까. 이수정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는 여전히 불안이 가득했지만, 아주 조금 다른 감정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정원 저편에서 다른 하녀 하나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이수정! 큰 접시 세트를 깨뜨렸다고 집사님이 찾으셔!" 그 소리에 이수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저, 저는 그런 적이 없는데..." 그녀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직감했다. 이수정처럼 조심스러운 사람이 실수로 접시를 깨뜨렸을 것 같지 않았고, 굳이 지금 이 시점에 그런 일이 터진다는 것도 우연 같지 않았다. "같이 가봐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수정과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주방에 들어서자 깨진 도자기 조각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집사가 험악한 얼굴로 이수정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값비싼 접시 세트를 깨뜨려놓고 어떻게 책임질 거냐." 집사가 다그쳤다. 이수정은 고개를 숙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안 그랬다고 말씀드려도... 저 말고 다른 사람이..." 그녀가 겨우 입을 열었지만, 집사는 들은 척도 안 했다. "다른 하녀가 네가 여기서 접시를 나르는 걸 봤다고 하는데, 무슨 소리냐." 나는 그 순간 이게 누군가의 계략이라는 걸 확신했다. 다른 하녀들 중 누군가가 이수정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상황이었다.
"잠깐만요." 나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수정은 저와 정원에 있었어요. 방금 전까지요. 그러니 접시를 깰 시간이 없었을 거예요." 집사가 나를 돌아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아가씨가 하녀를 이렇게 감싸는 모습을 처음 보는 거겠지.
"아가씨, 하지만... 목격자가 있다고..." 집사가 우물거렸다. 나는 최대한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목격자가 누군지 데려와보세요. 제가 직접 확인하겠어요." 이 말에 주방 안에 있던 다른 하녀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중 한 명, 아까 소식을 전하러 뛰어온 하녀가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너였구나." 나는 그 하녀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정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반응을 보면 대충 감이 왔다. 그 하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말을 더듬었다. "저, 저는 그저... 그렇게 들었다고 전한 것뿐이에요." 명백한 거짓말이었지만, 이 자리에서 그걸 밝혀낼 방법은 없었다.
"됐어요. 이 일은 제가 처리할 테니, 이수정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묻지 마세요." 나는 집사에게 말하고 이수정의 손을 잡아 주방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이수정은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따라왔다.
"아가씨, 왜 저를... 감싸주신 건가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당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에 책임을 지는 건 옳지 않으니까요." 이건 정말 단순한 진심이었는데, 이수정의 눈에 눈물이 살짝 고이는 게 보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나에게 다른 깨달음도 줬다. 이 저택 안에서 조용히 신뢰만 쌓겠다는 계획이 이미 무너지고 있다는 것. 다른 하녀들 사이에서 이수정에 대한 질투나 견제가 있고, 내가 조금이라도 다르게 행동하면 그게 곧 새로운 갈등을 만들어낸다는 것. 조용히 지낼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던 거였다.
그날 오후, 서건우가 다시 나를 불렀다. 이번엔 서재가 아니라 응접실이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들어서자 서건우 옆에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왕실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왕궁에서 온 사람인 것 같았다.
"서은하, 이쪽은 왕궁에서 오신 시종장이시다." 서건우가 소개했다. 시종장이라는 남자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형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공작 영애님, 왕태자 전하의 명으로 아카데미 등교 일정을 앞당기게 되었음을 다시 한번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부드러운 존댓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명백한 압박이 깔려 있었다.
"내일 아침, 왕립 아카데미로 등교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첫날부터 전하와 함께하는 공개 수업이 예정되어 있으니, 준비를 단단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시종장의 말에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내일이라니. 원래도 이번 주 안이라고 했는데, 그게 벌써 내일로 확정된 거였다.
"공개 수업이라니요? 어떤 형식인지..."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시종장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전하께서 직접 참관하시는 자리입니다. 영애님께서 그동안 얼마나 변화하셨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시더군요." 그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내용은 명백한 도전장이었다.
서건우의 얼굴이 살짝 굳어 있는 게 보였다. 그도 이게 얼마나 위험한 시험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시종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응접실에는 나와 서건우만 남았는데,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은하, 내일이 정말 마지막 기회다. 전하께서 직접 지켜보신다는 건, 이번엔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경고가 뒤섞여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왕태자가 직접 지켜보는 공개 수업이라니, 이건 단순한 등교가 아니라 사실상의 심판이었다. 그리고 그 심판대 위에서, 나는 육십 평생 쌓아온 경험을 전부 걸고 이 몸의 인생을 되돌려야 했다. 창밖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는 내일이 오는 게 두려운 동시에 묘하게 결의가 차오르는 걸 느꼈다. 이준혁이라는 이름, 그리고 밑줄 세 개. 내일이면 그 실체를 직접 마주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