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쪽지 맨 아래 적힌 이준혁이라는 이름을 한참 들여다봤다. 밑줄이 세 번이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게 뭘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몰라도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쯤은 확실했다. 밑줄 한 번이면 강조, 두 번이면 경고, 세 번이면 뭘까. 유서인가? 나는 쪽지를 조심스럽게 서랍 안으로 밀어넣었다. 지금 상태에서 함부로 들쑤셔서는 안 될 물건이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폭탄 처리반이 선을 하나 잘못 건드리면 다 같이 산화하는 그런 기분이랄까. 서랍을 닫는 손끝이 미묘하게 떨렸다.
일단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방에 계속 앉아있어봐야 정보가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서재로 부른다고 했으니 준비를 해야 했다. 벨을 눌렀는지 종을 흔들었는지, 아무튼 신호를 보내니 아까 그 하녀 이수정이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굴에 여전히 겁이 잔뜩 서려 있었는데, 그걸 보는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육십 평생 애들을 그렇게 무섭게 만든 적이 없었는데, 이 몸의 원래 주인은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녔던 건지.
"아가씨, 준비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수정의 목소리가 여전히 떨렸다.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어제는... 제가 미안했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이수정의 손이 멈췄다. 옷걸이를 든 채로 그 자리에 얼어붙은 걸 보니, 이게 또 얼마나 이례적인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마치 내가 갑자기 외계어를 구사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아, 아니, 아가씨께서... 사과를 하실 필요는..." 이수정이 말을 더듬으며 시선을 피했다. 뭔가 심하게 겁먹은 눈치였는데, 사과받는 것 자체가 함정일 거라고 의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긴, 매번 학대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과를 하면 그게 더 무섭게 느껴질 만도 하다. 오히려 손찌검을 예고하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로 이 몸의 주인이 얼마나 지독했으면 이렇게까지 학습이 됐을까. 나는 그 심정이 이해가 가서 씁쓸했다.
"괜찮아요, 그냥 제 진심이니까." 나는 담담히 말하며 준비된 옷을 걸쳤다. 옷감이 손에 닿는 느낌이 낯설었다. 육십 평생 이런 화려한 옷을 입어본 적이 있었나. 이수정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치였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그녀의 손끝이 리본을 묶으면서도 미세하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는데, 이게 두려움에서 나온 떨림인지 손재주가 원래 그런 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정보를 캐물었다.
"이수정, 제가 다니는 아카데미가 어떤 곳인지 다시 한번 말해줄 수 있어요?" 최대한 별생각 없이 묻는 척했지만, 이수정은 흠칫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아마 속으로는 '왜 갑자기 뻔한 걸 물어보시지' 싶었을 텐데, 티는 안 냈다.
"왜, 왜 그런 걸..." 그녀가 말을 삼켰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답했다. "왕립 아카데미입니다. 다음 달에 개학하고, 왕태자 전하도 같은 학년으로 다니십니다." 왕태자, 이준혁이라는 이름과 연결되는 순간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아까 그 쪽지에 적힌 이름이 그냥 아는 사이 정도가 아니라 약혼자였다는 걸, 나는 그 순간 직감으로 알았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이런 게 불안이라는 감정인가 보다.
"저희... 약혼한 사이였나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소리가 최대한 태연하게 들리도록 애를 썼는데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다. 이수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가씨. 삼 년 전에 정혼하셨습니다." 삼 년 전이라는 말에 이 몸의 나이를 다시 계산해봤다. 열여섯 살이면 열세 살에 정혼했다는 소리였다. 어린 나이에 정략혼이라니, 이 세계 귀족 사회의 규칙이 어떤지 대충 짐작이 갔다. 초등학교 고학년쯤에 결혼 상대가 정해진다는 거 아닌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해지는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왕태자 전하께서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던데." 나는 조심스럽게 넘겨짚어봤다. 이수정의 표정이 순간 복잡해졌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런 표정. "아가씨께서... 전하께 많이 집착하셨습니다. 그래서 전하께서 많이 힘들어하셨고요." 그녀가 말을 하다가 스스로 놀란 듯 입을 다물었다. 하녀가 주인의 흠을 이렇게 대놓고 말한다는 게 이례적인 일이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계속 말해줘요. 괜찮아요."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부탁했다. 이수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치 벼랑 끝에서 뛰어내리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아가씨께서... 전하 주변의 다른 영애들을 여러 명 아카데미에서 퇴학시키셨습니다. 증거를 조작하셔서요. 전하께서 그 일로 많이 화가 나셨습니다."
증거 조작으로 퇴학. 나는 속으로 신음했다. 이건 단순한 짝사랑 집착이 아니라 명백한 범죄 행위였다. 형사처벌까지도 갈 수 있는 사안 아닌가. 그리고 그 피해자들이 지금 아카데미에 그대로 남아있거나, 아니면 다른 형태로 원한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 몸으로 학교에 가면 사방이 지뢰밭이라는 소리 아닌가. 아니, 지뢰밭이면 그나마 다행이지. 이건 사방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화염밭 아닌가.
"그리고 오빠분, 서지안 도련님께서..." 이수정이 계속 말했다. "아가씨의 그런 행동들 때문에 공작가 전체가 폐하의 눈 밖에 나 있다고 걱정하십니다. 재상 나리께서도 요즘 조정에서 입지가 많이 좁아지셨다고..."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재상, 그러니까 아버지 서건우가 정치적으로 압박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게 단순히 한 소녀의 개인적 흠결 문제가 아니라 가문 전체의 존망이 걸린 문제라는 걸, 나는 그 순간 온몸으로 실감했다. 하늘이 노래지는 게 이런 느낌인가 보다. 서지안의 그 날 선 경계가 단순한 오빠의 걱정이 아니라, 가문의 미래가 위태롭다는 위기감에서 나온 거였구나. 어제 그 방문 앞에서 나를 쏘아보던 눈빛이 다시 떠올랐다. 그게 그냥 성격이 지랄맞아서가 아니라 정말 절박해서였던 건가.
"그렇게... 심각한가요?" 나는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걸 감추지 못했다. 이수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께서... 만약 전하께서 파혼을 정식으로 청하시면, 폐하께서 가문에 책임을 물으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파혼에 이은 가문 단죄. 이게 지금 내가 물려받은 인생의 실체였다. 로또 맞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빚더미를 상속받은 격이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이건 단순히 조용히 숨어 지내면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가족의 신뢰를 회복하고, 학교에서의 관계를 재건하고, 왕태자와의 파혼 위기까지 막아내야 하는,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재건 작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육십 평생 아이들 인생 상담해온 경험이 지금 이 순간처럼 절실하게 필요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상담해줄 애가 아니라 내가 그 애 몸에 들어와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수정,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가 퇴학시킨 그 영애들, 지금도 아카데미에 있나요?" 이수정이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아뇨, 퇴학당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들 가문에서 여전히 이 일을 잊지 않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복수의 씨앗이 이미 뿌려져 있다는 뜻이었다. 뿌려진 지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싹이 나기 전에 뽑아내는 게 상책일 텐데, 지금 내 손에는 삽조차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때 방문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고, 집사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급한 얼굴로 들어왔다.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방금 계단을 몇 층이나 뛰어올라온 것처럼 보였다. "아가씨, 공작님께서 지금 당장 서재로 오시라고 하셨습니다. 왕궁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급보. 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걸 느끼며 이수정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얼굴에도 불안이 스치고 있었다. 옷 갈아입다가 뭔 급보야,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겉으로는 티내지 않았다. 왕궁에서 온 급보라니. 설마 벌써 파혼 얘기가 나온 건 아니겠지. 아니면 더 나쁜 소식일 수도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